쿠바와 포옹하기
7월 1일, 미국 백악관은 쿠바와 미국 사이에 대사관 재개설을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1961년 단절된 이래 54년 만에 국교정상화가 코앞에 닥친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작년 12월 전격적으로 선언한 후 반년이 조금 넘어 큰 합의에 이르렀다. 양국 대사관은 이미 1977년 ‘이익대표부’란 이름으로 설치한 외교공관을 수리하여 개선하는 수준에서 문을 연다고 한다.
같은 날, 우리나라 외교부장관도 국회보고에서 올해 안에 쿠바와 관계정상화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현재 ‘2015 쿠바문화예술축제’라는 큰 제목 아래 ‘쿠바 현대영화제’(6.27-7.5)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것도 그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쿠바에서 열린 ‘아바나 비엔날레’에 한국인 작가가 시내 낡은 건물에 ‘감은사지 석탑 걸개’를 내 건 것과 같은 맥락이더라. 그런 화해 무드 속에서 쿠바를 방문한 기억이 이젠 낯설지 않다.
쿠바는 1949년 7월,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으나, 1959년 쿠바혁명 후에 교류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무역관이 문을 열어 작년의 경우 5,700만 달러의 교역을 진행 중이다. 이미 쿠바는 오랫동안 북한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쿠바에는 한국어 관광통역자들이 여럿 있는데 모두 평양 유학파 출신이라고 한다.
쿠바여행 중 첫날 방문한 곳은 혁명광장에 있는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 기념관과 1959년 혁명의 영웅들의 기념물이었다. 사실 호세 마르티 동상은 광장, 학교, 관공서와 가정집 앞마당 까지 어디든 존재했다. 그들은 지금도 독립운동 중인 듯 느껴졌다. 광장 내무성 건물 외벽을 장식한 체 게바라의 메시지도 그 현실을 들려준다. “영원히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그들은 아직도 독립과 승리를 목말라하는 아픔의 역사를 지녔다.
놀랍게도 쿠바에 한인이 살고 있었다. 혁명광장에 이어 찾아간 곳은 아바나 교외 ‘호세마르티 한국-쿠바 문화클럽’이다. 거기서 만난 한인 후손 안토니오 노인은 한인 3세였고, 현재 6세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천 여 명에 이르는 후손 대부분은 아바나 동쪽 마탄사스 지방에 거주한다고 들었다.
문화클럽에는 1921년 멕시코에서 건너와 쿠바에 정착한 초기 한인들의 역사가 낡은 사진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당시 이민자의 신분증, 자녀들의 혼인잔치를 볼 수 있었고, 쿠바에서 퍼져나간 ‘에르네스토 림-김’ 가족의 가계도, 그리고 수십 년 전 광복절 행사와 ‘쿠바 한인회 창립’ 모습을 담은 일종의 풍속도였다. 그들이 비싼 월세를 물어가면서 문화센터를 운영하는 이유가 있었다. 자기 후손들에게 또 쿠바인들에게 “여기가 내 고향이다”, “우리도 조국이 있다”라고 알리고 싶은 것이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한인동포들은 “유카탄의 한인후손을 잊지 마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환영했다. 그들은 새까맣게 잊고 산 멕시코 한인디아스포라의 존재를 전해주었다. 1900년 3월 6일, 제물포항을 떠난 영국 상선 엘보트호는 1천 33명의 멕시코 이민자를 싣고 긴 항해 끝에 두 달 만에 유카탄의 베라크루스 항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농장주들에게 넘겨져 각지로 흩어졌고, 이들의 행적은 훗날 인삼행상 박영순이 전언하였다.
미국에 있는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 장사를 하던 그는 멕시코까지 내려갔다가 뜻밖에도 이주한인들을 만났고, 이 사연은 북미 한인공립협회를 거쳐 대한매일신보에까지 실렸다. 한마디로 당시 한인들의 생활은 ‘농장주인의 개’만도 못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삶이었다. 멕시코 이민자의 참상이 알려지자 대한제국은 외무협판 윤치호를 현지에 파견하였고, 또 미국교민단체인 국민회가 이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려는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은 실패하였다. 쿠바로 이주한 300명은 그 다음 페이지의 역사이다. 나는 문화클럽에 ‘색동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아주 잘 어울렸다.
돌아보면 바람 앞에 등불 같던 대한제국 정부가 멀리 멕시코로 이민한 자기 동포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대견스럽다. 또한 이에 응답하듯 민족의 고난과 희망에 꾸준히 동참해 온 멕시코와 쿠바 한인동포들의 나라사랑이 고마웠다.
올드 아바나 시내 비에하 광장의 골목 가게에서 쿠바 십자가를 찾다가 일행과 떨어졌다. 여행책자가 소개한 헤밍웨이가 자주 들른 델 메디오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해 서둘러 찾아가는 중이었다. 대성당 앞에서 쿠바 젊은이가 나를 가로 막고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바삐 검색하더니 숨을 고른 후 내게 들이 밀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가 보여준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혼혈인 그의 가족사진에는 한인 얼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후손인 그는 역시 한인후손인 나와 포옹하길 원했다. 쿠바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역사가 아닌 현실이었다. 바라기는 한-쿠바 국교정상화 과정이 쿠바인의 고난사는 물론 한인동포들의 아픔과도 포옹하는 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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