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없이는 미래가 없다
국내 유수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신학대학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학교문제는 이사장의 비인격적인 태도와 능력 이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속 내용은 다릅니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일부 이사들과 이사장, 총장과 교수, 교수와 교수사이의 복잡한 알력이 문제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어느 집단이건 그룹간의 이해관계는 치열하기 마련입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할수록 요구되는 것은 정의로움입니다. 정의의 관점이 부재할 때 복잡한 이해관계는 반드시 문제를 야기합니다. 정의는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정의로움을 지도자의 으뜸가는 자질로 꼽는 이유입니다.
지도자에게 정의감이 박약하면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익을 관철하려는 사람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이해 당사자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입니다. 문제를 정의롭게 풀어내려면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이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정의의 관점을 갖지 못한 정치력은 통합의 순기능보다 야합이란 역기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결국 이 학교는 정의롭지 못한 해법을 모색하다가 모두가 큰 부담을 떠안고 지금까지도 진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한 축을 이루는 동문과 일부 교수들은 학교의 미래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며 한탄합니다. 정의가 밀려난 후 찾아오는 후폭풍입니다.
비단 정의가 밀려나서 진통을 겪고 미래가 닫히는 경우는 이 학교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최근 대법원에서 재심 확정판결을 받은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판결내용은 간단합니다. 강기훈씨가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부추겼다는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증거를 잘못 채택해서 생긴 사법 실수가 아닙니다. 누군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강기훈씨를 범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누가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웠는지 도무지 밝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강기훈씨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이 엉터리였음에도 이를 받아들였던 검찰이나 법원은 유구무언입니다. 오히려 강기훈 사건에 연루되었던 책임자들은 현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강기훈씨는 24년간 고통 속에 시달리다가 힘겹게 간암투병중입니다.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는 것일까요?
사랑이 밥 먹여 주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가차 없이 현실의 이익을 택하라는 으름장이 담겨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기사회로 나아가는 징후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치고, 그것을 여상하게 바라보는 모습들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강기훈사건을 처리하는 태도는 마치 정의가 밥 먹여 주느냐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의가 밥 먹여준다고 선포합니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놀랍습니다. 정의가 없이는 안전한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미래가 닫히고, 망하게 된 것은 정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정의에서 옵니다.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61:8).
이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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