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정신
시인 김준태는 광주에서 참극을 겪은 후 얼마 지나 6월 2일 자 전남매일신문에 ‘아아, 광주여!’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장편처럼 대서사시 풍을 하고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길이가 짧아서, 모두 35행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중간 중간 흐름이 끊기기도 하고, 앞뒤가 조응하지 않는 대목들 때문에 사람들은 행간에서 검열 이면의 진실을 읽고자 애썼을 것이다.
원래 시의 원제는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이고, 무려 119행이었다. 잘리고 묻힌 피묻은 시의 원문이 다시 시중에 알려진 것은 지난 5월 13일 35년 만에 문을 연 ‘5.18 광주 민주화운동기록관’ 덕분이다. 여기에는 당시에 돌아다니던 두 가지 판본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시 원본을 검열한 계엄사는 광주 시민 뿐 아니라, 시적 진실마저 붉은 사인펜으로 난도질하였다.
계엄사는 감추고 지우려 했지만, 손이 빠른 당시 편집자들은 원문을 빼돌려 이미 10만부 이상 신문을 찍어 유통시켰다. 그래서 외신기자를 비롯해, 당시에도 알 만한 사람은 대개 이 시의 원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김준태 시의 원문을 읽으면 마치 감전 사고처럼 머리카락이 칼칼이 솟구친다. 그런 뜨거움과 함께, 광주의 아픔을 ‘십자가의 의미’로 승화시킨 시인의 영감은 ‘제도 밖 예언자’다운 민감함으로 가득하다.
놀라운 것은 아래 대목이 행간이 아닌 정식 싯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배경인지 모르지만 몇몇 단어들은 몹쓸 난도질 끝에도 겨우 생존한 항쟁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아아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아마 35년이 지난 지금도 죄인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광주 정신을 말하고, 광주 혼을 가슴에 쓸어 담고 산다. 현재의 광주가 그 이름같이 역사의 조명으로 번쩍이는 까닭은 한 때의 비극을 넘어 민주주의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광주와 같은 비극이 여러 사례 있지만, 모두가 광주처럼 기억되어, 부활하지는 못했다.
‘광주정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지난 5월에 대해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가슴 아파하며, 삶과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희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개인이 겪은 상처를 우리 사회 전체의 환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두고두고 분노하였다. 마침내 더 이상 광주와 같은 비극은 우리 현대사에서 발붙이지 못한다. 지금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막고 있지만, 역사의 엄숙한 행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수많은 참사들은 광주로부터 배울 일이다. 광주는 김준태 시처럼 사람들의 죽음을 헛된 희생이 아닌 십자가처럼 의로운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때문에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더 이상 광주는 남도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비장한 의미로서 ‘광주정신’은 공간적 개념으로 구분질 일이 아니다.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익명의 광주시민”인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그런 공통의 경험과 지혜가 있다.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에 대해 더 깊이 아파하고 더 뜨겁게 분노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해결을 정부나 정치인들에게 떠맡길 일도, 그렇다고 너나없이 모두의 책임이라고 두루 뭉실 위선을 부릴 때도 아니다. 너무 가볍게 십자가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당사자에게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다만 세월호 참사는 모두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그 죽음을 의미 있게 하고, 십자가 너머 부활로 이끄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정부가 자기 의도대로 시행령을 만들고,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승인한 저의는 무엇인가? 너무나 의뭉스러워 손금 보듯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 결론은 불 보듯 뻔하다. 과연 정부는 35년 전 전남매일신문에게 그랬듯이 ‘검열 전’과 ‘검열 후’의 행태를 반복하여, 세월호 참사의 사전진실과 사후규명을 가로막으려는가?
너나없이 광주정신, 호남위기를 말하지만, 이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정치인들의 위선은 갈수록 심각하다. 진정한 광주정신을 주장하려면, 제 이해관계에 따른 가름질이 아닌,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길을 택해야한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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