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격리된 세상
죽음이 우리 가운데 격리되었다. 죽음의 과정도 죽음의 기억도, 그리고 재현까지도 우리와 격리되어지며 죽음은 우리 가운데 소외되어졌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죽음을 잃었다. 죽음의 의미와 절차, 그리고 죽음 이후까지도 우리는 많은 부분 소외시키고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잃은 것은 종교를 잃어버린 것이다. 종교는 죽음을, 또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보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대면할 때 가지게 되는 질문이 있는 것인데, 아예 죽음을 외면하면서 이러한 질문조차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는 부드러워졌다. 이제 종교는 위로의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질문이 사라지고 난 다음, 종교는 힘들어하는 현대인들을 위로하며 힘을 주는 부드러운 면만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서 종교는 그 궁극성과 절대성을 상실했다. 죽음을 외면하는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더 이상 진리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현실마저 상대화되고 희화화 되는 현실에서 종교는 그 궁극성과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의 의미와 현실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결국 죽음과 함께 삶의 기준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종교가 담보해 주었던 절대성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삶에서 절대적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혼란과 불안을 가져왔다. 매 순간 선택이라는 존재의 위기 앞에 서야 하는 현대인들은 혼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불안을 가져오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이 없을 때, 삶의 혼란 가운데 핑계할 수 있는 궁극적 진리가 사라질 때 사람은 매 순간 마다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행동의 위기 가운데 서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 혼동을 불러온다. 그것은 불안이고 분열이다. 파멸과 몰락이다.
뒤르케임은 자살론에서 아노미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욕망이 채워지지 못할 때 겪게 되는 그 혼동을 그는 아노미라고 표현한다. 그는 종교가 자리를 잃어가고 있던 100여 년 전 그 시기에 사회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노미의 상태에서 사회적 통제가 그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종교를 그는 욕망을 자제시킬 수 있는 최선의 학교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그런데 현대는 사회도 종교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친숙한 친구로 이들을 내려 앉히고, 이제는 자신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성찰하고 기억하는 추모문화의 회복은 현 시대에 꼭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의 외면, 격리 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상실로 이어지고, 그것은 삶과 행동의 기준 상실로, 그리고 결국은 인간의 소외와 혼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이 어려워진 것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죽음과 신을 내어버린 자립한 현대인들의 한계가 드러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숙된 인간으로서 자유를 구가했던 인간들이 그 자유의 대가를 이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다시 죽음 앞에 진지하게 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회복은 인간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정신의 건강에 큰 진일보도 가져오리라 믿는다.
조성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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