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영성, 생활신앙
태백의 예수원(Jesus Abbey)이 설립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영성과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낯선 단어로 여겨져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해온 ‘비약적 성장’이란 말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영성은 교회 성장을 장식하는 보조물쯤으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 환경 속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예수원이 설립 50주년을 맞은 것은 정말 뜻 깊습니다.
예수원 설립자는 성공회사제였던 대천덕신부입니다. 1965년 강원도 태백시 하사미동에 위치한 해발 1077m 덕항산 자락 깊은 골짜기에 대천덕 신부를 위시한 몇 명의 사람들이 찾아들었습니다. 대천덕 신부의 가족들과 성미가엘 신학원 학생들, 항동교회 신자들과 건축노동자 형제자매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곳에 터를 닦고 기도하면서 군용천막을 세웠습니다. 예수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원이 영성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는 대천덕신부가 가졌던 영성의 깊이가 크게 작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아주 작은 교단이지만 네트워크가 견고한 성공회라는 교단적 배경도 일정부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원의 기본일과는 설립초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루 세 차례씩 예배를 드리고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노동과 함께 하루 세 번 드리는 삼종기도및 예배를 조도, 대도, 만도라고 합니다. 삼종을 전후하여 식사를 합니다. 식사는 삼종을 드리는 장소에서 공동체 식구들이 다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니까 노동과 기도, 식사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하루 일과 후에는 소침묵과 대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영락없이 예수원의 외형은 수도원 전통에 서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예수원이 그동안 개신교회가 잃어버렸던 수도원적인 전통과 내용을 보존해온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태백 예수원 영성운동을 주목해야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생활영성 때문입니다. 예수원의 설립목적을 보면 노동과 기도가 일치되는 삶을 추구하여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을 시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시험하다니!’, 대단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원은 이를 ‘신자 생활의 세 가지 실험'이라고 합니다. 그 세 가지 실험은, 첫째는 하나님과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두번째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신자 상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세번째는 기독교 공동체와 비기독교적인 사회와의 관계를 실험하고 검증하며 연구해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실험은 곧 기도와 코이노니아와 선교의 영역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실된 생활신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공동체를 거쳐 세상 속으로 들어가 실천하는, 기도와 삶이 일치된 능력 있는 믿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무기력은 생활신앙을 종교생활로 바꿔버린 타락에서 온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활신앙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삶(노동)과 기도가 일치’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영성은 하나님을 만난 흔적입니다. 영적 근육을 갖는 일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용기 있게 시험할 때에만 하나님을 만난 흔적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