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쳐짐의 미덕
환경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대개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사람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좋고 안락한 환경은 인간의 선한 성품이 자라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부적절한 토양이 되기도 하니까. 안락함은 오히려 야비함과 이기성을 발전시키기도 한다. 재계와 정계, 종교계의 부유한 2세들이 보여주는 추태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경에도 좋고 부유한 환경에서 야비하고 이기적인 성향만 발전되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 야곱과, 기아로부터 이집트와 세계를 구원한 요셉이 바로 그들이다.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에서 야곱은 교활한 이기주의자이자 마마보이였다. 그의 이름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이었고, 그 이름답게 그는 형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해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았다. 축복권마저 빼앗긴 형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분을 토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창 27:36) 그의 아들 요셉은 또 어떠했던가? 역시 풍요로운 아버지 집에 살았던 때의 그는 아버지의 일방적 편애를 받으면서 형들을 눈 아래 보던 안하무인이었다. 배려심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던, 형들이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의 인간성을 지닌 동생이었다.
그러던 그들은 그 좋은 환경, 그 부유한 환경이 박탈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한 인간이 된다. 내쳐짐을 겪고 나서야 선한 인간이 된 것이다. 호된 처가살이, 하나님과의 씨름, 그로 얻은 불구, 불행한 가족사 등을 거친 노년의 야곱은 드디어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말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형들과 부모까지도 발아래로 보았던 그의 아들 요셉은 모든 사람의 발아래 놓인 노예로 긴긴 세월 내쳐짐을 당하고 나서야 겸손한 인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5) 그는 자신을 내친 원수들을 대면하고서도 그 내쳐짐 속에서 원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읽는다.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 그들의 인격과 신앙은 내쳐짐의 환경 속에서 자랐던 것이다. 선한 성품이라는 씨앗은 내쳐짐의 토양 속에서야 비로소 자라날 수 있었다. 모든 내쳐짐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이나, 내쳐져야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내쳐져야 할 바에는 온전히 내쳐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어쩌면 지금은 나아져야 할 때가 아니라 더 내쳐져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진경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