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성공회 서울대교구 사무실에 들렀다가 성공회에서 발간한 대림절 묵상집과 사순절 묵상집을 한 권씩 얻었습니다. 간결하고도 은혜로운 내용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묵상집에는 집필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필자 이름이 없다고 했더니 원래 성공회에서는 집필한 신부들의 이름을 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절기 묵상집만 그런게 아니라 월간 ‘생활과 묵상’ 큐티집도 그랬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성공회 공동체의 영적 건강과 생명을 증진하기 위해 발간된 묵상집,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신선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이 특히 그렇습니다. 마치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의 주인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지요.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는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벽돌에다가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벽돌에 이름을 새겨서 구움으로 자신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름을 떨치라, 그러면 흩어짐을 면하리라’ 이런 불멸사상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비극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의도를 악하게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까닭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고 하는 행위를 악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개명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경의 중요한 인물들은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개명의 정점에는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개명의 의미는 더욱 선명합니다. 특히 바울이 된 사울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인들은 이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히브리식 사고방식에서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닌 인격체의 본질 및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야곱과 바울은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는 오로지 자신의 이름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는 일’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 다음에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삶으로 말입니다. 이름이 바뀐 바울은 그 이름대로 주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로 일관되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벨탑에서 시작된 이름 이야기는 안디옥에서 얻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됩니다. 지금껏 ‘지극히 개별적인 삶’(unique)을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떨쳐야만 인생을 제대로 산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들. 지금껏 인류가 걸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유혹이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는 이 오래되고도 광범위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바벨탑의 비극은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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