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고통 자체는 결코 유익이 아니며, 그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은 눈물과 고통 없는 세상을 천국으로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 자체가 유익이 아닐지라도 고통이 유익하게 사용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고통을 겪은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겪은 다른 이를 잘 위로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으로부터 진심어린 이해와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일까?
지금도 주위를 둘러보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자주 보게 된다. 내 작고 평범한 인생이 결코 겪어보지 못한,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절실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고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쉬이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자식을 잃은 슬픔, 일터를 빼앗긴 고통, 집을 쫓겨난 비애, 이 모든 고통 앞에서 비교적 평범하고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감히 어떻게 위로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위로는 반드시 같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소설집 <대성당> 중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위로에 대한 색다른 관점을 들려준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부부는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생일 케이크를 빵집에 주문한다. 그러나 아이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져 며칠을 보내다 결국은 죽게 된다. 이를 알 리 없는 빵집 주인은 밤마다 케이크를 가져가라 독촉전화를 걸었고,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부부는 빵집 주인을 찾아가 화를 쏟는다. 사정을 알게 된 불쌍한 빵집 주인은 어쩔 줄 모르고 사과하고 부부에게 자신이 만든 따뜻한 빵을 대접한다. 그리고 부부는 신비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작가는 빵집 주인을 자식도 없이 외롭고 힘들게 중년을 보낸 사람으로 설정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그런데 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부를 위로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삶의 외로움을 길게 얘기했을 때, 그가 만든 빵을 먹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부는 진정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탁월한 번역의 원문은 ‘a small, good thing’이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똑같은 고통을 겪지 못했다고 위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좀 더 용기를 내보도록 하자. 작고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는 좋은 것, 나만의 그 무엇으로 누군가는 생각보다 엄청난 위로를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차피 위로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 내 작은 몸짓이 그 통로가 되면 그뿐이니까.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마 5:4)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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