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3일 길
주제가 무거우니 가벼운 얘기로 시작하자. 내 친구 하나는 여행길에 기념품점에 들르면 꼭 술잔을 산다. 머그잔 같은 것이 아니라 소주잔 크기의 작은 잔을 산다. 저녁때 반주를 즐기는 그는 이런저런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는 것도 작은 재미 중 하나라고 말한다.
나의 경우엔 기념품점에 들르면 볼펜을 사게 된다. 그래서 꽤 많은 볼펜을 모았다. 요즘은 컴퓨터로 업무를 보니 볼펜을 쓸 일이 별로 없는데도 볼펜에 대한 나의 애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내 책상에는 라스베가스 호텔객실의 싸구려 볼펜도 여러 개 있다. 그러니 호텔카지노 로고가 찍힌 볼펜들을 보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꽤나 게임을 즐긴다고 생각하던데 나는 게임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모임 때문에 라스베가스에 가끔 가게 될 때면 그저 싼 방 값이 미안해(?) 기념으로(?) 20불정도 슬롯머신을 해보는 것이 고작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가 제단을 쌓는다. 드디어 아들을 제물로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이를 말리며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 내용에 대해 그렇게 잔인하고 가학적인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며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살았던 4천 년 전엔 부족들 간에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고, 수많은 신들에게 인간제물을 드리는 의식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우리 한반도와 중국에선 천 년 전만 해도 왕이 죽으면 많은 여인들을 왕의 시체와 함께 산채로 매장해버리는 풍습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사건을 일반화하여 받아들일 수는 결코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영생을 믿었으므로 그가 아들을 데리고 걸어간 3일 길도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는데 나는 그런 식의 비현실적이고 무지한 믿음에 동의할 수 없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도 십자가 전날 피땀을 흘리며 괴로워하셨는데 하물며 인간인 아브라함임에랴. 이 사건의 교훈은 기독교인이라면 아무리 귀한 것도 하나님보다 앞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돈, 명예, 건강, 아니 자식까지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아들을 애지중지하며 때론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겼을 지는 성경의 전후를 살펴보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시험 하셨겠는가.
비바람이 몹시도 불던 밤이 지나고 아침에 나가보니 언덕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작디작은 잎사귀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는 것도 창조주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럴진데 볼펜을 모으고 술잔을 모으는 사소한 애착에서부터 애간장을 끊어내는 고통이 따르는 일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세상의 온갖 일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개입 없이 우연히 벌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섞여 살며 돈 문제로 긴장하며 이웃들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다보면 과연 기독교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부끄러워지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돈을 바라보고 자존심을 앞세우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의 구하라’는 말씀을 따라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에 더 방점을 두었던 나의 얄팍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앞세운다 함은 나 자신만의 이익을 탐하기보다 모두의 이익을 생각하고 내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병들고 가난한 소외된 이들과 함께 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가끔 아브라함의 3일 길을 묵상해본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위해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려야하는 고통 중에도 묵묵히 3일 길을 걸어가 ‘죽어야 사는’ 신양의 승리의 역설을 이룬 아브라함의 그 위대한 믿음을 오늘의 나의 삶에도 적용하며 본받고 싶다.
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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