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와 디오게네스
때 아닌 춘설이 종일 이 지역을 기습하고 갔다.
그것도 자그만치 8인치, 지난 겨울 적설량을 하룻 만에 능가하고 간 셈이다. 겨울이 나에게 베풀고 간 마지막 선물이려니.
눈은 언제 와도 첫 눈처럼 느껴진다. 하얗다. 사랑이 언제 찾아 와도 첫 사랑처럼 느껴지는 것 처럼.
그렇다. 사랑의 색갈은 분명 저 눈 처럼 하얗다. 내가 너의 색갈이 되어 눈처럼 사라지는 것이 사랑이다.
눈 덮힌 숲속에 들려오고 있는 봄 척후병들의 사각거리는 숨가쁜 군화발 소리들… 굳이 시인 엘리엣트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봄은 역시 치열함으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잔인한 계절이다. 기다릴 줄 모르는 정복자다.
차라리 지난 겨울은 가난한 마음으로 죽음과 사랑을 배우는 따뜻한 계절이었다. 숲 속 가족들 모두가 벌거벗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 줄기 따사한 아침 햇살에도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감사하며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평등이라는 것은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더불러 사는 사랑의 지혜인지 모른다. 겨울을 지내고 나면 숲 속 나무들의 나이테들이 하나 씩 늘어 간다. 평등을 위해서 죽음과 사랑을 앓고 난 아픈 흔적들이다.
춘설을 바라보며 케롤과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일화를 나누었다.
알렉산더는 약관 20세에 아버지를 계승해서 마케도니아 군왕이 되었고, 30세에 페르시아를 정복할 만큼 걸출한 전쟁 영웅이었다.
나폴레온은 자기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호언을 했지만 여러차례 전쟁에서 패한 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는 그와는 달랐다. 전투에서 패 해 본 적이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 난 전투의 달인 중 달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그 당시 최고의 지성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그는 철학과 학문에도 남달리 조예가 깊었 던 걸로 알려져 있다.
또 평소에 독서를 즐겨 호메로의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를 전쟁 중에도 항상 곁에두고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34세의 젊의 나이에 승전고를 울릴 궁전을 눈 앞에 둔 거리에서 말라리아 병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삶은 늘 그토록 극적이었다.
솔직히 그는 나폴레온이나 히틀러와 다름없이 정복이라는 개인적 망상에 사로잡혀 수 십만의 인명을 희생시킨 인류의 한 전범자였다. 평화주의자인 나의 존경 대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번뜩거리는 개인적인 일화들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거지로 생활하고 있는 통속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직접 찾아가 지혜를 구할 정도로 통이 크고 별난 임물이었다. 오늘 날 불통의 정치 지도자들은 감히 꿈 속에서도 상상 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너무 잘 알려 진 유명한 일화다. 알레산더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든 다 들에주겠다" 며 호기를 부리며 말을 걸었다. 이에 디오게네스는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제발 비켜 서 주십시오" 하며 감히 군왕을 상대로 비아냥 거렸다. 옛날 조선 시대 같으면 역모죄로 사형, 오늘 날 한국 정치판 같으면 국가원수 모독죄 내지는 반공법으로 옥살이를 할 텐데, 알레산더는 역시 대인이었다.
미안한 얼굴로 자리를 비켜서며 “너는 역시 내가 단 한 번도 정복해 보지 못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 비결이 과연 무엇인지 나에게 가르쳐 달라' 하며 진지한 태도로 자문을 구했다.
이에 디오게네스는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당신이 걸치고 있는 군왕의 제복을 벗어 던져버리고 벌거벗은 채 내 옆 모래사장 위에 누워 딩굴어 보십시오. 당신도 바로 이 순간에 체험할 수 있을 것이 행복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나는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이다. 그 일을 다 끝낼 때까지만 기달려 달라.” 그러면서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알렉산더가 아니라 디오게네스 너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다.”고 진지한 목소리로 고백을 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 나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알렉산더 대왕으로 태어나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하고 응수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두고 자기를 정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디오게네스 의 당당함을 칭송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알렉산더 의 겸손과 솔직함에 더 마음이 끌리곤 한다. 디오게네스 같은 임물은 심심찮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같이 임물은 천년에 한 번 쯤 나올까 말까 하는 겸손과 소통의 지도자일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천하를 정복하고도 결국 인도 정복 중 물린 한 마리 모기에 무릎을 꿇고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 직전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내 양 손을 관 밖으로 내 놓고 장례식 행렬을 거행하도록 하라.천하를 정복한 이 알렉산더도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만 백성들에게 알려주어라.”
그의 유언이 맞았다. 죽음은 만인에게 공평했다. 그도 디오게네스도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채 결국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버지니아에서 박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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