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점심을 주시옵고
빵은 인간의 먹거리와 생명을 책임지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다. ‘빵과 물’이란 관용구는 최소한의 음식을 의미한다. 우리말성경 개역개정판은 빵이나, 밥 대신 “떡”(막 14:22) 또는 “생명의 떡”(요 6:48)이라고 번역한다. 떡은 날마다 필요한 양식인 밥이나 빵보다 덜 절실하니, 현실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빵이나 밥이 일용할 끼니라면, 떡은 어쩌다 먹는 잔치음식이거나 간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존할 조건으로 가장 기본은 빵이다. 그리고 ‘빵과 장미’를 합하면 사랑이 되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 예배가 되며, ‘빵과 촛불’을 나란히 하면 추모의 마음이 된다. 밥을 같이 나누는 일만큼 다정한 친교가 없다. 독일 사람은 이웃에 이사 온 사람에게 ‘빵과 소금’을 선물한다. 환영의 뜻이 담겼다. 러시아 우주인들도 그들의 전통에 따라 서로 환영하면서 검은 빵을 선물한다고 한다. 문제는 빵에 담긴 생명의 힘이다.
조선에 온 선교사 헐버트는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고 하였다. 유대인의 속담에도 “사람이 콩깍지를 먹게 되면 하나님께로 돌아 선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밥과 빵으로 상징되는 먹고 마시는 일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는 생존의 문제이며, 생명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먹을 것이 귀한 시대에 사람들은 음식 속에서 창조주의 신비를 발견하였다. 고대 근동에서 빵을 자르는 일은 죽은 자의 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삼시세끼 부족함 없이 즐기면서도 종교적 의미를 담아내는 일에 미숙하다. 습관적으로 서양에서는 빵을 자르기 전 칼로 십자가를 그리고, 우리 어머니들은 솥에서 밥을 푸기 전에 주걱으로 십자 형태로 긋고 복을 기원하였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한 복판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가 있다. 여기에서 “일용할 양식”은 곧 ‘하루 먹을 끼니’의 문제이다. 주님은 ‘모든 날들’(뜨레주르)의 빵이 아닌, 바로 오늘 하루의 빵을 구하라고 하신다. 사실 사람들은 그때그때 단 한 때를 위해 음식을 먹을 뿐, 평생의 양식을 한꺼번에 갈무리 할 수는 없다. 광야의 일용할 양식인 만나 역시 단 하루용만 구할 수 있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일용할 양식”은 참 절실한 문제이다. 그래서 로마이어는 네 번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이야말로 가장 중심이고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돈 버는 문제,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걱정, 자녀로 인한 근심 등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록 겉으로는 세상적이라고 뒤켠에 감추었지만, 속으로는 가장 열중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이 즐겨하는 유머의 한 대목이다.
어떤 버터회사 사장이 007가방에 현금을 가득 채워서 교황을 방문하여 청원하였다. 주기도문 중에서 ‘일용할 빵’(daily Bread)에다 ‘버터’(and Butter)를 붙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교황은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였다. 주님께서 직접 정하신 내용이어서, 이제 손 댈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때 버터회사 사장은 007가방을 슬쩍 열어 보이면서 이래도 안 되겠냐고 교황의 마음을 흔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교황은 몹시 아쉬워하며 사양하였다. 버터회사 사장은 크게 실망하면서 문으로 나가던 중, 돌아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교황이시여,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그러면 빵공장 사장은 얼마를 드렸나요?”
예수님은 당시 곤궁한 사람들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다. 파송 받은 제자들의 입장도 남다르지 않았다. 탁발을 통해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은 절실한 문제였다. 일용할 양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들은 내일의 염려가 아닌, 당장 오늘 굶주림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선거철마다 우리 사회에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사이에 논쟁과 갈등이 반복된다. 새 달부터 경상남도는 아예 학교 무상급식을 없애고, 모든 학생에게 밥값을 받겠다고 한다. 그동안 이루어 온 사회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어엎는 일이다. 대안으로 서민들의 교육사업을 지원하겠다는 명분이 ‘한 끼 밥 그릇’보다 진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세상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한 끼 점심만큼 서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른들의 탁상행정이 무심하다.
송병구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