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며칠 전 집단 따돌림으로 고통 받는 청소년들에 관한 다큐를 보았다. 가해자들에 대한 깃털 같이 가벼운 처벌, 다시 시작되는 피해자들의 공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욕을 참으며 생각했다. 7,80년대라고 학교폭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악의 양상은 아니었는데,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강요된 지독히도 가파르고 빠른 삶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모든 배려심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폭되고 첨예화된 경쟁, 과도한 학업량으로 지금 청소년들의 마음엔 그 어떤 여유도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초중고생들은 터지기 직전까지 바람을 넣어버린 풍선과도 같다. 그들은 늘 바쁘고, 늘 스트레스에 가득 차 있고, 그래서 늘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건드려만 봐라, 그들은 늘 이런 마음이다.
1973년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존 달리와 대니얼 뱃슨은 종교와 이타성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일군의 신학생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하고는 이 설교를 녹화하기 위해 다른 건물로 이동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실험자들은 그 건물 입구에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을 배치했다. 과연 신학생들은 자신들의 설교를 얼마나 실천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아파보이는 남자를 지나쳤다. 실험을 약간 수정해 가능한 한 빨리 녹화 장소로 가야 한다고 요청하자 이번엔 고작 10%의 신학생들만이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었다. 실험의 주제는 종교와 이타주의의 관계였으나 이 실험은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처음 50%에 육박했던 선행이 두 번째 실험에서 10%로 떨어진 이유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바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책 <괴짜 심리학>에 이 실험을 언급한 리처드 와이즈먼은 이 경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빠른 삶의 속도가 사람의 배려심을 어떻게 앗아가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독일생활에서 부러웠던 것은 사람들의 여유와 친절이었다. 고3들조차 오후 서너시면 다 집으로 오고, 학원은 없다. 모르는 사람들도 마주치면 늘 인사하고, 깜빡이만 켜면 모든 차들은 다 양보해준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독일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던 선입견은 마침내 베를린에서 깨졌다. 이 대도시에서는 경적 소리가 난무했고 운전은 난폭했다. 각박한 환경에서라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사회 전체에 배어있는 배려심은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보장된 여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을 사람답게, 배려심 깊게 만든 것은 인성이 아니라 제도였던 것이다.
여유란 마음의 빈자리를 의미한다. 어찌 보면 신앙 역시 마음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빈자리에만 머무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빈자리도 없으니 하나님께서 활동하실 여지 또한 있을 리 없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움직이실 빈자리를 만들 책임, 이것은 당연히 어른들의 몫이다. 제도에서든 개인의 마음에서든 마음의 빈자리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만들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니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치 신앙이 그러하듯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폭주할 때 나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멈추겠다는 결단, 세상에서의 뒤처짐을 대가로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겠다는 결단, 하나님께서 거하실 빈자리를 원한다면 바로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눅 10,42)
이진경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