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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17]
 
 
 
     
 
 
 
작성일 : 15-02-13 01:32
   
안심을 찾습니다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42  


안심을 찾습니다


  참 불안한 하루였다. 영종대교에서 일어난 106대 자동차의 연쇄추돌사고는 어제 일 같지 않다. 짙은 바다 안개가 일 년이면 수 십일씩 반복되는 자연현상임에도 바다 위 다리에 여전히 관측 장비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니, 내일도 그런 사고가 이어질 듯하기 때문이다. 첫 추돌 사고가 발생한 시각부터 잇따라 충돌을 겪은 후 겨우 차량을 통제하기 까지 무려 28분이 걸렸다고 한다. 불현듯 전 국민이 뉴스로 지켜보면서도 단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던 세월호 악몽이 떠오른다. 


  정부는 지난 해 봄, 진도 앞 바다에서 일어난 대참사 이후 안전을 구두선처럼 되뇌고 있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와 재난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국민안전처를 만든 이후에도 그 효용성을 체감할 겨를 없이 국민의 생활은 전천후로 위협받고 있다. 날마다 벽창호를 두드리는 위기전문가들은 재난불감증이니 고속성장통이니 말하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딴 데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생명존중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에도 그런 사고가 되풀이 되었다. ‘육해공’(陸海空)에서 연속으로 발생한 큰 재난 때문에 당시 군사독재 이후 등장한 문민정부는 크게 휘청거렸다. 결정적으로 마침표를 찍듯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1997년 IMF 사태는 결코 반추하고 싶지 않은 국민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책임을 압축성장의 폐해로 돌린 탓에 결국 정부차원의 누구도 공적(公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시중에 ‘무서운 개그’가 유행하였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불안한 사회심리를 반영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가장 무서운 전쟁은 ‘무서워’(war)이고, 가장 무서운 소년은 ‘무섭군’(君), 가장 무서운 소녀는 ‘무서울걸’(girl), 가장 오랫동안 무서운 것은 ‘무섭지롱’(long), 이런 식이다. 불안한 세상이 무섭도록 불안한 허무를 낳았다. 무서움을 이런 방식으로나마 조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후진국 형 사고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사람들은 점점 더 중증의 불감증을 앓게 되었다. 그것이 정말 무서운 이유이다. 그 위험의 규모가 얼마나 더 커졌는지 웬만한 재앙은 놀랍지 않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재앙을 지켜보면서도, 이미 2007년 설계수명이 끝난 고리1호기 핵발전소에 대한 정부의 수명연장과 재가동 의지가 무섭다. 고리1호 원전은 이미 130회의 고장을 겪은 바 있다.  


  가슴에 맺혀있는 온갖 사건사고와 인재든 관재든 재난들을 통해 예방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재앙도 그런 재앙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사고만 터지면 대안처럼 등장하는 CCTV 류의 ‘사후’약방문이 아니다. 세세한 매뉴얼과 과장된 노하우가 위기에 닥친 이웃과 흔들리는 우리 사회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2중 3중으로 두텁게 형성된 ‘사전’안전망과 함께 바르게 사는 방법, 정직하고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포함한 공적시스템이 필요하다. 만약 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 공동체의 안전시계(視界)는 언제나 ‘제로’일 수밖에 없다.  


  끔찍한 사고를 겪을 때마다 번번이 지구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호들갑을 떨다가도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둔감하고, 무감각해지는 것은 위험천만한 증세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강심장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웃과 공동체가 공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기 내면의 빗장을 닫아걸게끔 만든 우리 사회의 자폐증이 더 큰 문제다. 사람들에게 개인의 안전을 넘어 공동체의 평화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보니 그야말로 치유가 어려운 중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설마와 우연을 안전신화로 삼고 살기에 사람들은 너무 지쳤다. 앞으로도 설마는 끝없이 사람을 잡을 것이고, 우연처럼 보이는 현상이 쌓이고 쌓여 필연적 하인리히 재난법칙이 될 것이다. 과연 ‘안심(安心)하고 사는 비결’이 있기는 한 것일까? 밤새 안녕과 같은 인사가 어떤 거창한 안전구호보다 훨씬 실감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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