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행복
‘지속가능한 행복’이란 말이 가능할까요? 벌써 이십여 년 전에 김창국 변호사가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스페인이 일본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배우려고 시찰단을 파견했다지요. 일본 사회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돌아온 시찰단의 일성은 뜻밖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일밖에 모른다. 그렇게 일만 한다면 우리는 일본인보다 훨씬 더 빠르고 크게 성장을 할 수 있다!’ 오직 경제성장밖에 모르는 일본인을 향한 조롱이 담겨있던 말이었습니다.
이랬던 일본의 최근 상황을 이문재 시인은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직 경제성장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성장이 멈춰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엊그제 한 일간신문 칼럼에서 압축 성장 시절,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상징했던 고시원이 더 이상 고시생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고시원은 비싼 주거비를 지불할 수 없는 이들이 머무는 영구적인 주거형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시원은 철저하게 1인을 위한 주거공간입니다. 고시원에서 꿈꾸었던 화려한(?) 인생역전의 꿈은 영원히 사라질 상황에 처했습니다. 고시원의 전락은 인생역전을 허용할 수 없는 한국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팍팍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김종철 녹색평론발행인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합니다. 이대로 가면 이 나라는 망하겠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아이들이 요즘 어른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감정 없이, 구김살 없이 대하는 게 점점 줄어들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렇답니다. 이 땅에 교육은 없고 황폐한 폭력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게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리 되었을까요? 과도한 경쟁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몇 십 년 전, 경제성장이 활발하고 사회적 부가 팽창할 때는 거의 모든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일을 골라서 할 수 있었습니다. 취직은 다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장은 멈추었거나, 멈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성장은 지속될 것이다!’ 지속적인 성장은 거짓입니다.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듯 살인적인 경쟁으로 내몰릴 까닭이 없습니다.
머지않아 일본처럼 경제성장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튼실한 사회적 대안이 없는 일본이 망연자실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할지 모릅니다.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농경문화입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반이 경험했고,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농(農)의 사회 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었던 그 유대감. 그것은 아스라한 먼 옛날의 추억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살려낼 불씨가 우리 사회 안에 남아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가늠해 보는 작업을 시행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진실한 신앙의 시험입니다. 한국 감리교회는 신학을 위한 다섯 가지 지침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체험’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체험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다....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와 기아, 고독과 절망, 잘못된 경제구조, 핵시대가 초래한 인류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이런 체험은 성서적 규범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의 확실한 지침입니다. 돈의 가치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세상과 용감하게 맞서는 진실한 신앙의 시험이 곳곳에서 힘차게 펼쳐진다면 아주 작지만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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