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리
우리에게 정해진 순리 중에 하나는 죽음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나 항상 아닌 듯이 사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다. 김열규 교수는 이를 죽음에 대한 백치라고 했다. 즉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백치인 것처럼 모른 척 하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가까운 곳에 두고 살려고 했다. 과거 어르신들을 보면 손수 ‘수의’를 준비하셔서 자기 눈에 보이는 장롱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자식들에게는 수의를 해 놓아야 장수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했지만 죽음과 친하려는 마음이다. 좀 더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자신의 묘자리를 먼저 봐 놓기도 한다. 더 나아가 관이 들어갈 곳을 미리 파놓기도 하고, 꼼꼼하신 분들은 그 자리에 먼저 누워보며 편안한지 확인하기까지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순리로 받아들이기 위한 연습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네 관습 중에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는 임종을 중요시 하는 것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가장 복된 죽음을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적 가치관이긴 하지만 우리는 자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 차례와 제사는 그런 조상들을 기억하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은 항상 기억될 자신의 선한 모습으로 각인시키길 원했던 것 같다.
요즘 우리에게 죽음은 이러한 순리라고 할 수 없다. 죽음이 삶의 연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절로 나타난다. 의학이 발달한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다. 요즘은 과거 고칠 수 없었던 수많은 병들이 치료되고 있다. 우리 세대에서도 볼 수 있었던 치명적인 병으로 결핵을 꼽을 수 있다. 과거 목사들이 결핵으로 죽을 고비에서 하나님을 만나 서원했다는 간증을 꽤나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결핵은 이미 극복되어진 병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우리 시대의 큰 축복이다.
그런데 이 의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또 다른 고민을 안겨 준다. 죽음이 순리가 아니라 역리가 된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의료진들은 보호자에게 묻는다. 생명연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말이다. 산소마스크를 포함한 생명연장의 도구들과 약물들이 얼마의 돈이 드는데 계속할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보호자들은 연민과 양심의 가책, 그리고 현실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삶의 시한을 결정해야 하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다. 의학의 발전은 결국 이 마음과 함께 죽음을 순리가 아닌 역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도 죽음이 이렇게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이 항상 축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바를 따르는 것이 인간에게는 축복이고 의무인데 어느 순간 우리는 죽음이라는 그 궁극의 뜻을 거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가리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죽음이 옳은 것인가를 가름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음조차 돈과 기술로 판단해야 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오만방자해 진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조성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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