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가는 길
왜관에 다녀왔다. 바깥 날씨는 혹독하였지만 무궁화호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풍경은 아늑하게 느껴졌다. 경부선을 타고 내려가 낙동강을 건너자마자 첫 정차역이 바로 왜관이었다. 멀리 말로만 듣던 칠곡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거대한 회색빛이 아주 낯설었다. 낯익은 것은 이맘 때 쯤 전국 공통된 현상인 대학합격 축하현수막이었다. 수도원 길목과 부설 순심학교 입구에 걸려있었다. 괜한 트집일까? 겨우 한, 두 명의 합격자를 추켜세우는 모습이 수도원 정신은 아닐 성 싶었다.
일부러 찾아간 수도원은 왜관 역 뒤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처음 세울 때만 하더라도 한적했을 동네인데, 이젠 수도원이 시내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호젓하리라는 한가한 기대는 이미 어긋나 버렸다. 독일 베네딕도회가 조선선교를 시작하여 처음 수도원을 세운 곳은 원산이었다. 초기 덕원수도원은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 박해를 받았고, 결국 공산세력의 억압을 피해 이곳 대구 못 미처 왜관으로 이주한 것이다.
베네딕도는 6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 남쪽 수비아꼬에서 정주 수도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역사적으로 수도회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베네딕도 수도규칙은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가 대표적이다. 그는 ‘기술자, 건축가, 개발자의 성인’으로 불린다. 그래서 베네딕도회는 사회현실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아마 왜관수도원이 일찍이 인쇄와 출판에 눈을 뜬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분도’(芬道)는 베네딕도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향기로운 길’이란 뜻이다.
일부러 왜관을 방문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분도출판사에 대한 고마운 추억 때문이다. 오랫동안 출판사 대표를 한 임인덕 신부의 전기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를 읽고 난 후, 문득 이곳을 방문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임인덕, 독일인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선교사는 1966년에 한국으로 파송 받은 이래 대부분 왜관에서 살았다. 50년 가까이 그는 책을 만들고, 영상을 보급하였다.
그는 임기 중 400여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특히 7-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적 암흑기에 등불 같은 책들을 보급하였다.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해방신학’을 비롯해 우화집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출간 등, 그야말로 ‘향기로운 길’을 닦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분도출판사의 책들은 아주 값싸고, 실속 있으며, 영성과 시대정신이 가득하다.
나는 30 여 년 전부터 분도가 만든 책들을 읽고, 공부했지만 임 신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돌아보니 그는 출판인으로서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충실했던 수사였더라. 이번 방문길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겠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뵙지 못했다.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신병 치료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가, 결국 소천(召天)했다고 한다. 그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1980년대 초, 성경과 우리 현실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눈뜨게 한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의 구절들은 여느 시국성명서들보다 날선 비수처럼 무딘 양심을 찔렀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는 또 어떤가? 니카라구아의 작은 농촌마을 솔렌티메나 공동체의 복음서 읽기는 세상을 전복할 성경의 능력을 깨워주었다. 그리고 ‘해방신학’은 목회자로서 내 존재감을 뒤집었다.
진실에 목마른 사람은 여전히 많을 테지만, 더 이상 목마름을 축여줄 우물 파는 선구자 찾기가 참 힘든 시절이다. 복음주의란 이름의 음료수 장수만 넘쳐난다. ‘큰 장마에 마실 물 없다’고, 사람들은 스마트 폰과 인터넷 검색의 홍수 속에서 갈증의 밑바닥을 더듬고 있다. 따져보면 낙동강 칠곡보에 가득 채운 강물조차 인근의 가뭄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식이다.
돌아보니 그 분은 척박한 땅에 단비를 몰고 온 봄 길이었구나 싶다.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기 위해 마중물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긴 가뭄, 황량한 벌판을 촉촉이 적시며 다가 올 봄비를 기다린다. 왜관에서 돌아오는 길, 너무 일찍 무언가를 마중하는 마음으로 들떠있었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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