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꽃
몇 해 전에 미국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한국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영성공동체 ‘워크 투 엠마우스’의 지역 회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국교회의 문화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해 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에 가면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 기도 중에 사람들이 ‘아멘’한다고 해서 기도가 끝난 것이 아니다. ‘스몰(small) 아멘’을 여러 번 한 후, 모두 함께 ‘빅(big) 아멘'을 하면 그때 기도가 끝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아멘, 아멘’하는 한국 교인들의 기도 습관을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진지하지만, 우리에게는 우스운 에피소드였다.
웃음은 사람들을 쉽게 묶어 준다. 거의 20년 전 일이다. 독일 라이프찌히 ‘교회의 날’에서 남북 교회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공식적인 자리가 끝난 후 다 같이 모여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서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니, 차를 마시는 자리조차 사뭇 불편하였다. 그때 우리 쪽에서 누군가 가벼운 우스개를 꺼냈다. 이것이 웃음꽃을 끌어내어 저마다 비장의 유머를 이어가더니, 결국 남과 북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웃음은 아주 가볍게 장벽을 넘나들었다.
종교 간에도 웃음코드는 한몫을 한다. 에큐메니칼 순례 모임에 동행했던 원불교 교무 한 분이 우리 일행이 가이드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을 빗대 이런 속담을 꺼냈다. “벼룩 서 말은 데리고 다녀도 중 셋은 함께 다니기 어렵다”. 이 말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님이든, 신부든, 목사든 자신들의 고집과 독선에서 비롯된 실수담들을 줄줄이 유머로 엮어 나갔다. 내용인즉 서로의 부끄러운 속살을 고백하는 해프닝이었다. 각자 성역을 다루는 처지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인간성을 드러내면 그것도 유머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난을 겪어온 유대인은 웃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만큼 괴로움이 많았기 때문일 테고, 또 웃음을 통해 커다란 교육효과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웃는다. 인간 가운데서도 현명한 자일수록 잘 웃는다”. 그래서 누구든 웃을 준비를 벼르며 살아가는 모양이다.
정치적인 가쉽(Gossip)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작가 브레히트는 1933년에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를 썼다. 이런 대목이 있다.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렵혔다네”. 유머는 어디서든 용감하게 사람들의 공감을 파고들었다.
웃음이 위험하게 취급된 적이 있었다. 흔히 웃음산업을 가리키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단어는 중세시대 유럽의 개념이었다. 인간은 늘 신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신 이외에 더 즐거운 것이 들어와 인간을 사로잡아 무아지경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에서 “조직이 완전히 정비된 사회는 경직화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의사표시는 기계적이 될 위험성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당한 말씀이다.
웃음은 눈물과 함께 사람의 병을 치료한다. 흔히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고 하지 않던가? 민간에 전래해온 약방문에 따르면 ‘배꼽이 깊으면 병’이라고 했다. 맘껏 웃으면 깊은 호흡을 하게 되고, 그러면 폐로부터 충분한 공기가 교환되어 심장이 빨리 뛰는 운동효과가 생긴다고 한다. 게다가 얼굴과 목둘레의 근육이 적당히 자극을 받고, 또 횡경막과 복부의 근육도 자극을 받기 때문에 웃다보면 결국 배가 아플 정도라니, 임상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웃음은 어디에서든 환영받는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약방의 감초처럼’ 분위기를 살리는데 제 몫을 한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건강한 웃음이 가득하면 좋겠다. 웃음의 소비자로 만족할 일이 아니라, 웃음의 생산자가 되면 더 ‘므흣므흣’ 할 것이다. 항상 심각할 정도로 경건의 얼굴을 해온 교회가 세상을 달콤하게 만들 그런 감초역할에 먼저 나서면 어떨까? 우리 사회와 소통하는 건강한 웃음, 사람사이에 평화를 꽃피우는 웃음, 그런 ‘이삭의 꿈’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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