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M+B+15
교회력으로 빛의 절기인 주현절이다. 이 기간은 1월 6일 주현일부터 시작하여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날까지다. ‘주현’(主顯)은 에피파니(Epiphany)로 ‘드러나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보여준 절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교회에서는 주현절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메시아의 등장을 기억하는 절기인 주현절을 가리켜 헨리 나우웬은 “사랑과 마주치는 계절”이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미처 사람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자신의 메시아 됨을 드러내셨다. 외양간의 구유나, 골고다의 십자가가 대표적이다.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본래 주현절은 초대교회 이래로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를 축하하는 통합적인 축일이었는데,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기 시작하면서부터 서방교회는 동방박사의 방문과 관련지어 축하하고, 동방교회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여 축하한다. 지금도 독일 일부 주에서는 삼왕절, 영국령 국가들은 ‘박싱 데이’(Boxing day)로 명절이다. 작은 크리스마스, 묵은 크리스마스, 세 박사의 날로도 불리는데, 철지난 성탄장식을 철거하는 때도 주현일이다.
주현절기의 상징은 별과 촛불이다. 모두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조명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동방박사의 경우에서 보듯 별은 미래에서 다가오는 희망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별빛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빛의 여행을 통해 우리 곁에 찾아온 것이다. 이처럼 주현절은 메시아의 임재에 대해 말하는 절기이다. 주현절 첫째주일은 ‘그리스도의 세례’(마 3:16-17)를, 주현절 마지막 주일은 ‘주님의 산상변화’(마 17:1-5)를 기념한다.
독일에서는 삼왕절이 되면 거리에서 동방박사로 꾸민 세 명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세 박사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얼굴을 검은색으로 분장한다. 어린 박사들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노래를 부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 집집마다 사탕과 쵸코렛으로 답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세 박사의 이름을 대문에 적는 전통이다. 주현절에 현관문에 백묵으로 ‘20+C+M+B+15’이라고 적는데, 우리식으로 하면 마치 대문에 써 붙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연상시킨다. 역사가 삐드는 동방박사 세 사람을 카스파르(Caspar), 멜키올(Melchior), 발타사(Balthasa)라고 불렀는데, ‘C+M+B’는 세 사람의 이름에서 딴 머리 글자 모음이다.
흔히 세 사람의 동방박사는 인생의 세 단계를 상징하며,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대표한다. 카스파르는 키가 크고 수염이 없는 30대 미만의 젊은이로 유향을 선물로 드렸고, 발타살은 얼굴이 약간 검고 수염이 난 40대로 몰약을 바친 인물이며, 멜키올은 키는 작지만 순하고 긴 수염을 가진 사람으로 황금을 선물로 가져왔다.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세 가지 선물이 나타낸 상징성을 풀이하기를 “아기 예수야말로 참된 왕이요, 최고의 제사장이며, 마침내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신 가장 높으신 구주가 되심을 예언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랜 옛 이야기를 통해 동방박사의 꿈을 재현하려고 한다.
한 마디로 ‘20+C+M+B+15’는 2015년 새해와 함께 맞이한 주현절 축복문이다. 암호 같은 숫자와 알파벳 모음은 ‘그리스도여, 이 집을 축복하소서’(Christus Mansionem Benedicat)란 뜻을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현현이 갖는 의미이다.
성탄 절기조차 한나절 잔치로 축소된 요즘, 대림절부터 시작하여 성탄절 그리고 주현절로 이어지는 예수 탄생절기들이 무슨 감동이 있을지 모르겠다. 십자가 없는 교회의 현재가 아픔이라면, 구유를 상실한 교회의 오늘은 슬픔이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전통과 역사의 기초 위에 희망과 미래의 징표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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