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그 연약함에 대하여
성탄절이 지남과 더불어 교회력을 시작하는 대림절도 끝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교회는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신 예수를 기렸고,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기다림을 되새겼다. 언제나 새로운 삶의 정황 속에 언제나 새로운 울림을 주는 낮고 천한 자리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그러나 아기로 오신 구세주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겸손과 낮아짐만이 아니다. 높고 낮음이라는 지위의 은유로만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의미를 묵상하던 어느 날, 한 여성신학자에게서 아기로 오신 예수에 대한 뜻밖의 성찰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학자 앞에 ‘여성’을 붙인 이유는 차별의 맥락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성찰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존경의 의미에서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예수께서 아기로 오셨다는 사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기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실로 그렇다. 길거리에 알몸으로 내버려진 아기는 살아날 수 없다. 아주 작은 양의 영양공급만 없어도 아기는 그리 길게 살아남지 못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도움이 없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모습으로 인간 앞에 던져지신 것이었다. 인간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믿었던 신은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장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로 이 땅에 스스로를 계시하셨다. 사랑의 과격함과 철저함. 인간을 향한 신의 무모하리만치 커다란 믿음. 아기로 오신 예수에 대한 그 여성신학자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들에 닿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구세주의 모습은 아기의 모습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최후의 심판에서 영생을 누릴 양과 영벌에 처할 염소를 가르는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과 동일시하셨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마실 물이 없어 갈증에 목 타는 사람들,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핍박 받으며 떠도는 사람들, 추위를 막아줄 옷이 없어 길거리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 병들었으나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 정의를 외치다 감옥에 갇혀 고통 받는 사람들... 예수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이 모든 사람들이 바로 자기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이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아기로 오신 신의 모습은 그 아기가 어른이 된 후에도 이렇게 계속된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숨어계신다. 세속의 공기는 점점 더 매서워지고, 시대의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가는데, 여전히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그 모습 그대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마 25:45)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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