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하나 됨같이
최근 이 사회의 신문과 뉴스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보도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갑을논쟁’이다. 본사는 물건만 넘기면 된다는 식으로 대리점 사업주를 억죄고, 아파트 입주민은 미화와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원을 인간 이하로 무시하더니, 급기야 어느 항공회사 부사장은 직원의 실수에 노발대발하며 이륙 준비 중이던 비행기를 회항시켜 버렸다는 당황스런 소식들이 들려온다. 아무리 자신이 이 사회의 ‘갑’이고, 그런 권한이 있더라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모두가 제 멋대로, 제 감정대로, 제 욕망대로 하는 짐승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법과 윤리를 훼손시키며 날뛰는 자들을 민주사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응당 경찰이 그를 체포해서 법정에 세우고 그 죄 값에 맞는 처벌을 내리면 된다. 그런데 법의 공정한 심판을 믿지 못하니 여론은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응집된 ‘을’의 분노는 마치 하이에나가 먹이를 물어뜯듯 ‘갑’의 행태를 줄기차게 씹어댄다. 그런 의미에서 ‘을’ 역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구든 제 멋대로, 제 감정대로, 제 욕망대로 처리하는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회는, 아니 목사인 나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며칠 전 일이다. 이제는 장성한 딸애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별일 아닌 문제로 막 화를 내며 야단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갑이라는 의식이 몸에 배여 있어 딸을 을로 여기며 무례하게 막 대한 것이다. 정신이 들어 생각해보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이다.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더욱이 딸애는 그 애대로 무척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환갑도 넘은 나이에 딸애하고 싸우다니… 내가 이것밖에 안되었나!”
후회도 잠시,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고 볼 일이었다. 먼저 나의 잘못을 하나님께 자백하고 지혜를 구했다. 그리고는 용기 내어 미안한 마음을 담은 엽서를 한 장 써서 용돈과 함께 딸아이의 침대 위에 살포시 놓아두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딸아이의 기분이 풀렸고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저도 죄송해요. 아빠 힘내세요!” 휴,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요즘 같은 세상에 딸애가 인터넷에 여론화시키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정말 큰 일 날 뻔 하지 않았나. 그저 단순한 비약일까?
돌이켜 보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이들의 마음속에도 제 멋대로, 제 감정대로, 제 욕망대로 함부로 행하고 싶은 짐승 같은 마음들이 있다. 그래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박경리도 유고시집에서 “옛날의 그 집”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아! 나는 언제, 우리는 언제 이렇게 독기를 빼고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세계 속에서도 시인처럼 편안히 노래할 수 있을까?
대강절 네 번째 촛불을 밝히는 주일이다. 어둔 우리 영혼에 다시 불을 밝혀, 이제는 으르렁거리는 짐승들의 소리를 몰아내어야겠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소망해본다. 높디 높은 하늘과 낮고 낮은 땅이 만났던 성탄의 하나 됨같이 우리도, 그리고 이 사회도 갑을논쟁을 넘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김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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