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루기
가부장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고루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바탕에는 가부장 문화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몇 년 전 귀여운 아저씨, 귀여운 아버지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중압과 권위에서 벗어나 망가지는 아저씨를 보면서 솔직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인간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저씨돌’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초식남이 대세’란 말도 유행했는데 초식남이란 남자답다고 여겨지는 육식성, 그러니까 공격성이나 적극성이 거세된 남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적극적인 대시를 하지 않는 초식남들 때문에 여성들의 속이 타들어간다는 사연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가부장적인 태도는 가부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비호감입니다. 그래서 나온 생존전략이 ‘아저씨돌’이고 ‘초식남’이라는 사회현상입니다.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귀여운 아저씨라는 말은 서글프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여운 아저씨는 소통의 언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귀여운 아저씨는 우리사회의 소통의 수평축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소통이란 게 한 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수평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직축입니다. 인간은 수평적으로만 소통한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수직적인 소통이 이뤄질 때 삶은 튼튼하게 세워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평적인 소통만 강조하면 인간의 삶은 왜곡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직적인 소통은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는 것, 수직축을 세우는 문제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은 모세의 모습을 통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을 때 모세는 자신의 권력으로 소통의 주도권을 가졌습니다. 그의 소통은 막힐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소통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쭉쭉 뻗어나가던 소통의 수평축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장애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소통의 수직축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수직적인 소통의 축이 작동하면서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모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나님과의 대화는 힘겨루기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힘과 경험을 신뢰하는 모세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존재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밀쳐냅니다. 그러던 그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 하나님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따르게 됩니다. 모세의 힘겨루기가 끝나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수직적인 소통은 이렇듯 어렵습니다.
우리 문화는 하나님과의 힘겨루기를 부추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주로 내세우는 자원들은 지식과 경험, 물질이나 지위, 가지고 있는 힘과 인간관계 따위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모세처럼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내 삶에 개입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과의 힘겨루기가 끝나고, 소통의 수직축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모세는 모세가 되었습니다. 모세 이야기를 빌려서 소통의 수직축이 열려야만 인간은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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