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기다림
대림절이 다가온다. 강림절 또는 대강절이라고도 부른다. 모두 ‘아드벤트’(Advent)를 번역한 것인데, 그 중 대림절이란 이름이 절기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기다릴 대(待)’와 ‘임할 임(臨)’ 속에 그 내용이 다 담겨있다. 이미 오신 예수와 다시 오실 예수,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 우리 시대는 존재한다. 어둠이 깊어 가면서, 이제 대림절 첫째 주일(11월 30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림절은 ‘어린왕자’처럼 이 땅에 오신 가난한 아기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절기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6). 어둠과 빛을 강조하는 성탄 메시지처럼 대림절은 빛의 길을 밝히는 절기이다. 요즘 시절을 살펴보니, 어둠만도 못한 각박한 세상이 아닌가?
프랑스 격언에 “두 요한이 일 년을 나눈다네” 라는 말이 있다. 두 요한은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12월 동지의 성인이고, 세례 요한은 6월 하지의 성인이다. 하지와 동지는 빛의 갈림길이 되는 날이다. 하지부터 빛이 점점 줄어들고, 동지부터 빛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빛의 갈림길에서 두 성인이 존재함을 믿었다.
북구에 가까이 위치한 독일은 겨울이 일찍 찾아와 늦은 오후만 돼도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이미 어둠이 한층 깊어진 겨울의 문턱 어느 날 빛의 물결이 시방에 흐른다. 11월 11일, ‘마틴의 행진’(Martin Zug)이 바로 그 빛의 주인공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아마 단 한 지역도, 단 한 명의 어린이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또는 교회 마당에 모인 동네 아이들은 손에 저마다 장식한 등불을 들고 행진을 시작한다. 어둑한 저녁나절, 꼬불꼬불 줄을 지어 걷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마틴의 노래를 부르고, 또 반복해 부른다. 아이들의 목에는 아직 따듯한 브레쩰 빵이 걸려 있다. 유모차에 내 걸린 아기들의 작은 등불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부모들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행렬 뒤를 따른다.
성 마틴은 주후 317년 지금의 헝가리 땅인 자바리아에서 태어났다. 군인인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인 마르스를 따서 마르티누스라고 붙여주었다. 아버지의 강요로 마르티누스는 25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로마의 군인이 되었지만, 그의 이름에 담긴 숙명과 달리 군인의 길은 그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추운 겨울 밤, 한 거지를 위해 자신의 겉옷을 반으로 잘라 덮어준 마틴의 선행은 잘 알려진 설화이다. 그 겉옷은 다름 아닌 군복이었다.
그날 밤, 마틴은 자신의 반쪽 겉옷을 덮고 계신 예수님을 목격한다. 그의 나머지 삶이 구도자로서 길을 걷게 된 것은 자연스런 소명의 결과였다. 마틴은 평생 청빈과 겸손 그리고 구제를 실천함으로써 위대한 수도자로 살았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종교교과서를 통해 “우리는 엘리자베드처럼 나누고, 마틴처럼 돕습니다” 라고 배운다.
이렇듯 성 마틴은 모든 아이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인물이다. 4세기 사람 마틴이 밝힌 등불은 수많은 다른 등불을 이끌어 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11월 11일을 상품화 시켜 한국은 ‘빼빼로 데이’로, 중국은 ‘1’자가 네 번 겹쳐 더 외로움을 느낀다며 ‘광군제’(독신자의 날)로 만들어 상품화하는 현상을 보면 멀리 마틴의 등불은 더욱 반짝반짝 느껴진다.
돌아보면 어둠의 세력은 빛을 가두려고 하였지만, 결코 어둠 속에 진리를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21). 바로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 어두운 것은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두움을 밝힐 한 자루 촛불이 되어야 한다.
“주님, 주님이 오실 때에 누군가는 집에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밤낮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실야 발터).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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