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후예들
“나는 이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
예수에 대해 처형 판결을 내린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서 물을 가져다 손을 씻는 퍼포먼스를 벌이며 이렇게 외쳤다. 현행법으로 처벌이 불가능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잠재적 폭동과 그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사형판결을 내린 그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알량한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군중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 무죄한 피는 내 책임이 아니라 당신들 책임이라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역사는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는 오고 오는 세대가 반드시 그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예수의 고난을 언급하며 예수께서 그 누구도 아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문구를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그에게 예수 죽음에 대한 무한책임을 덧씌웠다.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텐데, 사실 그는 예수를 죽이겠다는 군중들을 살짝 거들었을 뿐이었는데, 그는 그만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받고 말았다.
얼마 전 대법원은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비록 위헌이긴 하지만 그 법을 실행한 공무원들은 죄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이 불법이었어도 시키는 대로 준행한 공무원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6백만 유대인 학살의 최고 책임자로 처형당했던 아이히만은 지하에서 땅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그의 논증을 정리하자면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무원이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모든 재판과정을 지켜본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에 그의 죄목을 이렇게 적었다. “생각 없음.” 아이히만의 불행은 단지 그가 2014년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세월호와 관련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말들과 글들을 본다. 당연한 현상이고 앞으로도 더욱 그래야 할 터이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 중에 이상한 공허함을 품고 있는 말들과 글들을 보게 된다. “사회가 문제야.” “정치인들이 문제야.” “이들도 나쁘지만 저들도 나빠.” 책임자를 명확하게 적시하지 않은 채 애매하고 두리뭉실한 비판을 던지는 성명서들, 결코 ‘위험한 수위’를 넘지 않는 말과 글들. 어쩌면 그들은 그저 그렇게 말하면서 ‘그래도 뭔가 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뭐라도 할 말을 찾은 것뿐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손을 씻은 빌라도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도처에 빌라도의 후예들이 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죄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 적당한 선에서 적당한 말과 행동을 보이며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준엄한 양심의 질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 침묵에 대한 비난은 피하고 싶으면서도 섣부른 반항이 가져올 피해를 염려하여 선을 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히 자신의 손을 씻는다. 나는 이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며.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 5:37)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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