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우리는 태초의 살인을 기억하고 있다. 동생 아벨을 살해했던 형 가인의 살인. 이 끔찍한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기쁨이 넘쳤어야 할 감사 제물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제각각 제몫의 한 해 소출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쳤던 제물이었다. 농사를 지었던 가인은 땅의 수확 중 가장 좋은 소출을 드렸으리라. 양을 치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것은 거부하셨던 것이다.
도대체 왜?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성경이 그 이유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가인과 아벨의 이름의 뜻으로부터 유추해내기도 했고, 아담으로 인해 저주 받았던 땅과 농사를 연관시켜 거부의 이유를 설명하려고도 했다. 모두 짐작이었고 그러기에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것은,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상관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살인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부당한 ‘이유’가 아니라 거부당했을 때의 ‘반응’이리라.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거부당했을 때의 반응이 아니라, 나는 거부당했지만 내 옆의 사람은 인정받았을 때의 반응이다.
순서도 중요하다. 앞서 아벨의 것은 인정받았으나 그 다음 나의 것은 거부당했다. 가인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으리라. 동생 앞에서 이런 망신이라니. 망신은 분노로 이어졌고, 분노는 살인을 낳았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나 형은 동생을 들로 불러냈고 거기서 형은 동생을 죽였다.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가정을 해보자. 만약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의 제물 모두를 받으셨다면? 당연히 그 끔찍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거부하셨다면? 마찬가지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거부하셨다면?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의 실패를 위로했을 것이고 아마도 형제간의 우애는 더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비교로 인한 열등감.
이 가인은 바로 나다. 아벨이 죽은 이상 우리는 모두 가인의 후예가 아니던가. (여기서 나는 가인의 후손이 아니라 셋의 후손이라 주장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인의 마음은 너무나 익숙하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면서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너만 없으면 나는 행복할 텐데’라고 가인처럼 말한다. ‘너만 없으면’이라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살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같으며 살인은 그 마음을 그저 실행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가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살인의 추억은 현재의 사태가 된다. 죽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죽임을 멈추는 일의 시작은 정작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요일 3:15)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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