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과 썩 어울리지 않는 이 말도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다. 기독교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각인된 나머지 복수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복수라니. 그러나 모든 성경의 구절이 그러하듯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심지어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도 모두 각자의 맥락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철저한 복수를 의미하는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뜻밖에도 이 보복법은 약자들을 위한 법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듯 세력가들과 부자들은 자신의 말을 거역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가난한 자의 눈을 뽑고 이를 부러뜨렸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다. 돈으로 변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나님은 바로 돈으로 해결하면 그뿐이라는 이 비열한 행태에 철퇴를 내리신 것이다. 만일 세력가들과 부자들이 가난한 자의 눈을 뽑고 이를 부러뜨린다면 이것은 결코 돈으로 변상할 수 없다! 반드시 가해자들의 눈을 똑같이 뽑고 가해자들의 이를 똑같이 부러뜨리라! 보복법에 담긴 의미는 이렇게 약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 32:35)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분이시다. 약자들을 대신하여 복수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복수의 금지는 단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복수에 대한 금지에 한정될 뿐 복수 자체의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수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복수가 필요한 상황, 즉 가해자가 무고한 희생자를 해코지한 일이 이미 일어나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생기는 피해자의 억울함, 복수의 본질은 바로 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현대사회 속에서도 복수는 제도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중이다. 사법제도란 다름 아니라 피해당사자인 개인의 복수를 국가가 대신 해주는 것, 즉 개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회의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
억울함이 가장 극에 달하는 지점은 살해다. 자연사 같은 어쩔 수 없는 죽음에는 슬픔이 따르나, 인위적 죽임인 살해에는 분노와 억울함, 복수심이 따른다. 그리고 사고로 인한 죽음은 이 둘 사이를 오간다. 자연사를 닮은 불가피한 사고의 죽음이라면 슬픔뿐이나, 살해를 닮은 인위적이고 피할 수 있었던 사고의 죽음이라면 슬픔과 더불어 분노와 억울함이 함께 발생하기 마련이다. 4월 16일 ‘사건’이 되고만 사고, 이 사고가 억울하고 분노스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거짓말들을 보았다. 최선을 다해 구조하고 있다고 했지만 구조는 일어나지 않았다. 구조는, 없었다. 국가가 전문가라서 구조를 전담시켰다는 민간업체는 한 달 후 TV에 나와 우리는 인양을 하러 갔다고 말했다. 침몰 위험이 있어 배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해경선은 단 한 번 정확하게 선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선장과 선원들만 구해냈다. 그 이후 끊임없는 은폐와 거짓말, 거짓말. 우리는 그 모든 은폐와 거짓말들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사건’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풀리지 못한 억울함은 여전히 공기 속을 부유한다. 이 먹먹한 억울함 속에서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어찌 그립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시 94:1)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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