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영주
여러해 전에 법학자 조국 교수는 386세대 정치인들을 ‘왕과 영주’라는 말로 신랄하게 질타한 적이 있습니다. 왕이 되려는 꿈을 접고 영주가 되는 것에 안주했다고 말입니다. 영주는 왕에게 받은 봉토가 있고, 자신에게 속한 농노도 있습니다. 일정한 조건을 가지고 왕과 교섭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왕이 되는 길과 영주로 사는 길 중에 어느 길이 편안하고 이익이 많을까요. 당연히 영주로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기를 포기하고 영주처럼 생각하고, 영주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혁신은 없습니다. 이처럼 신랄한 질타를 받은 정치인들이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렇듯 왕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왕이 되길 포기한 영주 이야기는 정치인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삶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왕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그 신분을 명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왕이 되기보다는 땅에서 영주로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왕이라는 말, 생각하면 엄청난 말이지요. 그래서인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왕이라는 실감을 갖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지금 당장 잘 되는 것, 높아지는 것, 성공하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땅의 문제에 사로잡혀 하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신앙이 왕이 되기를 포기하고 영주로 사는 신앙입니다.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 사랑과 신앙의 순전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껍데기뿐인 종교 제도와 권력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니까 능력도 상실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 이데올로기가 들어와 악한 귀신처럼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종교화된 한국 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문제는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거의 모든 한국 교회들은 세월호 문제 앞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우리 사회에 가득한 슬픔과 한을 껴안고 생명의 복음으로 그 아픔과 한을 풀어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세상을 향해 단연코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초월의 능력입니다. 130년 전, 이 땅에 들어온 복음은 모든 것을 상대화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초월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얽매고 있던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했습니다. 반상(班常)과 계급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남녀의 차별을 혁파했습니다. 빈부의 차별이 교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전통과 관습은 여지없이 복음 앞에 부서졌고, 녹아졌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능력이었고, 복음을 통해 얻은 새로운 생명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거꾸로입니다. 생명의 능력인 복음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윌리엄 윌리몬은 ‘교회는 세상의 지배적인 문화에 반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항문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풍조와 가치관을 뒤흔들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맛보는 신앙이 왕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나라의 왕이라는 확신보다 땅위의 소소한 즐거움과 이익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습니다. 땅에서 누리는 몇 가지 안락함 때문에 왕이 되기를 포기했던 부끄러움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살아가기를 부지런히 연습해야 합니다.
이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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