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녁을 빗나가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공부 못하는 사람, 아둔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유한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theoretical atheists)이 아니라, 유신론자를 자처하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 즉 실천적 무신론자들(practical atheists)입니다. 그들은 자기로 가득 차 있어서 남을 위한 여백 없이 살아갑니다. 남들이야 고통을 받든 말든 나만 평안하면 그만입니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도 꺼리지 않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죄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타(chattath)입니다. 이것은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입니다. 죄란 그러니까 그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빗나간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는 것, 누군가의 동료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생각은 있어도 그렇게 살 내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세상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너 혼자 잘난 척 해봐야 너만 손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 말에 저항하려고 애도 써보지만, 거듭되는 좌절은 우리를 자포자기적인 상태로 몰아갑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타협이 시작됩니다. 타협하며 산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완고함과 무감각으로 무장합니다. 무감각해지면 타인의 고통이 그렇게 아프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자기 잇속에만 발밭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라도 주님을 멀리합니다. 이익 앞에서 십자가를 슬쩍 내려놓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나 삶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입니다. 저 또한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없는 걸까요? 모두가 다른 길로 빗나간 세상, 속속들이 썩어서 더럽게 된 세상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이들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크게 두려워한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5-6)
세상이 속속들이 썩었다고 탄식만 해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적당히 길들여진 채 사는 것은 믿음의 배신입니다. 새로운 공간과 기운을 만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저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사19:19)
거대한 이집트 땅에 세워진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 그리고 돌기둥 하나는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허무에 굴복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이제는 실천적 무신론자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모신 사람의 당당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적중하는 화살이 되어야 합니다.
김기석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