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욕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아름답게 만나 서로의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헤아리고 아무런 오해도 없이 상대를 이해하는 일.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적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드물게, 극히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일어날 뿐이다. 마음과 마음은 언제나 부딪히고, 한쪽의 선의는 자주 오해되며,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기에 언제나 오해를 풀려고 애쓰고 답답한 이 마음을 알아 달라 강변한다. 삶의 대부분이 이처럼 이해하고 이해 받으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채워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런데 어쩌면 이 모든 노력은 실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 욕심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끼치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익히는 예절 교육은 타인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명예와 자부심으로 귀결된다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 칭찬 받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어떻게든 상대에게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고자 하는 것에 집중된다. 심지어 관계가 깨져 헤어지는 마당에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할 정도니 이 집착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강박, 타인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강박은 오해 받는 일을 참지 못하게 만들고 서먹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불편해진 어색한 관계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도 어쩌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픈 이 열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얻고자 하는 마음, 즉 사람 욕심 때문에. 이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누군가에게 좋지 못한 사람으로 남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 말했듯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은 반드시 어느 한쪽이 문제가 있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불완전하고 타락한 피조물의 마음들이 빚어내는 일들은 말 그대로 애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 태반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람 욕심을 버리면 미처 보지 못했던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껏 내가 쓸데없이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가능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헛되이 소모했던 에너지를 조금만 방향을 돌려 이미 얻어진 아름다운 관계에 쏟는다면 그 효과는 경이로울 만큼 대단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쏟는 에너지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만 나를 좋아하고 믿는 사람에게 쏟는다면 그 열매는 놀랍도록 풍성해지고 삶은 담박에 달라진다. 일찍이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한 이들이 악마와 싸우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그들이 같은 양의 에너지를 자신의 동료들을 사랑하는 데만 쓴다면, 악마는 자기만의 권태의 경주 속에서 죽어버리고 말 것을.” 방향은 이다지도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기를 멈추자. 몇몇에게만 그런 사람이라도 인생은 충분히 족하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전 1:14)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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