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만보’(萬步)
가을과 함께 교회 문화부가 주관하는 트레킹에 동행하였다. 드높은 가을 하늘조차 한가롭던 토요일 오전, 우리 동네 바라산 휴양림 역시 도시 속 고요함을 자랑하였다. 의왕시가 지난 봄, 의욕적으로 문을 연 후 괜찮은 입소문이 돌았다. 숙박시설을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예약 후 추첨을 치룰 만큼 인기가 높다고 했다. 허긴, 엎어지면 배꼽 닿을 거리에 있는 깨끗한 잠자리와 캠핑 시설은 누구나 한번 쯤 하룻밤의 욕심을 낼만할 것이다. 요즘 같이 무더운 초가을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둘씩, 여럿씩, 무리를 지어 길을 걸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가을하늘 높이 무수한 말풍선을 날려 보냈다. 겨우 한 시간쯤 동네를 빠져나가 걸었을 뿐인데, 어느덧 내가 사는 도시를 한 눈에 조망하며, 기분 좋은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급작스레 청계사에서 바라산 휴양림으로 목적지를 바꾼 까닭에 예정보다 멀리 다녀왔지만, 모두들 한 10킬로 쯤 걸었다면서 뿌듯해 하였다. 두 해 전, 트레킹을 처음 할 때 느림보 수준에서 크게 진일보한 셈이다.
올해도 개인적으로 ‘나 홀로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다. 벌써 여덟 해 째인 올해 걷기도는 ‘정동진부터 울진까지’로 목적지를 잡았다. 시작하던 해, 평창 대화에서 정동진까지 걸었으니, 그 지점에서 100킬로미터 더 이어가려고 한다. 아마 동해안 겨울바다 풍경을 실컷 볼 것이다. 처음엔 걷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녔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그런 어리석은 이어폰을 내다 버렸다. 바람소리, 경적소리, 사람들 소리, 그 소리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자고 걷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샌가 내 밖의 소리는 작아지고, 내면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더라.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를 편집한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즉시 둘이 되기 때문이다. .. 혼자 걸을 때에도 육체와 영혼이 항상 그렇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 내 몸과 나 자신은 부부 같기도 하고 노래의 후렴 같기도 하다. 분명히 영혼은 육체의 증인이다. .. 영혼의 리듬을 따라야 하고,, 영혼과 함께 애써야 한다”.
걷는 일이 몸에 좋다는 것은 만인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자동차에 너무 익숙하고, 이동성이 편리하다보니 이젠 체질적 직립보행이 불편해졌다. 모자란 걷기를 보충하려고 의무감처럼 트레킹을 해야 하는 현대인의 행태는 참 어리석어 보인다. ‘일용할 걷기’에 탄력 있는 신발, 톡톡한 양말, 다용도 배낭, 기능성 바지까지 추가 비용을 계속 들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젠 ‘걷다’가 아니라 ‘트레킹 한다’가 일상어로 쓰인다니 좀 얄궂게 느껴진다.
어쩌면 일상의 걷기, 일용할 만보(萬步)는 생각하기에 따라 인생순례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음은 40일 간 ‘산티아고 순례 길’이나, 한 주 동안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도 마다 않을 열심이지만, 대부분 생활인에게는 일상 밖 멀리 존재하는 꿈일 뿐이다. 지금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당장 내 둘레와 주변을 걷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스마트 폰 앱에서 ‘만보기’를 내려 받아, 일상의 걸음을 점검할 이유가 있다. 나 자신 직립형 인간, 똑 바로 선 사회적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생은 한마디로 순례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평생 정지된 삶을 사는 붙박이 인생은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순간순간 선택하고, 나날이 변화하며, 자의든 타의든 동행하게 마련이다. 순례자의 심벌은 조개껍데기이다. 조개껍데기는 세례와 순례를 상징한다. 비록 조개껍데기 삶일망정 그저 그런 무의미한 삶은 하나도 없음을 내 두 다리가 확인시켜 줄 것이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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