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지남
중국에 다녀왔다. 2박3일 산동성 칭다오(청도) 여정은 언제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짧은 일정이지만 잠시 되새길 필요를 느꼈다. 경험한 청도는 40Km에 펼쳐져 있는 해변이 중심이었다. 2008년 중국 북경올림픽 때 중국 4대 항구도시인 청도에서 조정경기가 열렸다. 청도는 1896년 독일인들이 이 지역을 식민화할 의도로 조차(租借)했던 역사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그 후 일본에 이르기까지 치욕의 시대는 계속 이어졌다.
유려한 해변과 고즈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유럽식 붉은 지붕들과 반듯한 정원을 갖춘 집들은 문화유산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청도 중앙역에서 이어진 옛 시가의 미카엘 성당과 개신교회 등 옛 흔적은 지금도 살아있는 역사였다. 해변이든, 고풍스런 교회든 역사현장마다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들이 수 십 쌍씩 몰려들어 야외촬영을 하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중국 밖에서 온 전래상품은 관광청도의 역설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제대로 관찰할 수 없지만 중국의 경제 발전 속도만큼 그리스도교가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16세기 말,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는 베이징에 정착하여 서양의 문물과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유교문화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전례(典禮)에 관한 논란을 일으켰으나, 그가 지은 <천주실의>는 조선 전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와 이후 허드슨 테일러 등 선교 개척자들은 중국을 향해 끊임없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사실 맨 처음 발자국을 남긴 전도자들은 주후 635년 장안(서안)에 도착한 20여 명이 장본인들이다. 주후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축출된 이들을 따르던 일부가 시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페르시아에서 비단길을 거쳐 당나라로 들어간 것이다. 당 태종은 멀리 옛 로마제국에서 찾아온 서양인들을 환영하였고, 종교 포용정책을 폈다. 땅을 제공하여 예배당을 짓게 하고, 사제들이 거주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때 세워진 교회가 대진사(大秦寺, 로마절)이며, 이후 200년 동안 자유롭게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경교(景敎)라고 불린다.
현재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기관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통계에도 불구하고 대략 9천 만 명을 헤아린다. 복잡한 이유는 중국 사회주의체제의 공인교회인 삼자(三自)애국운동부터 지하교회 성격인 가정교회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교회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까닭에 중국에 있는 교회는 여전히 박해받는 교회라는 인식을 벗지 못하고 있다. 애덕기금회는 공식적으로 성경을 번역, 출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작 청도 시내에서 교회 건물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한 곳 있다는 기독교 서점을 방문하였다. 이름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으며, 간판에는 푸른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주요 관심사는 한자가 새겨진 십자가를 구하려는 것이지만, 중국교회 출판현실을 부분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성경의 종류와 신앙서적은 아주 부족하였다. 의도를 파악한 서점 주인은 인터넷으로도 보여주었는데, 의외로 중국어 찬양이 활발히 보급되고, 사이버 상으로도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확장된 화교들이 주도하는 한자권 선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중국 당국이 이러한 사이트를 차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기대와 달랐다. 중국 내부에서 만든 자료들도 흐름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있는 잡지 한권이 눈에 띄었다. ‘청도지남’(指南)이었다. ‘지남’이 무슨 뜻일까 살펴보았더니, ‘Guide’ 더라. 신학생시절에 학교 도서관에서 ‘신학지남’이란 월간지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지남’이 나침반이란 뜻인지 몰랐다. 청도에서 복음의 길을 물었다. ‘복음지남’, 곧 오늘 중국의 교회와 선교사들의 사역을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하면서 다시 한국교회가 처한 형편을 되묻고 싶었다. 내가 선 자리에서 그 길을 찾는 일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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