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객
벌써 20년 전 쯤, 어느 기업이 신문에 낸 흑백 광고사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광고 카피는 이런 문장이었다. “올해도 둘째 사위는 오지 못했습니다”. 추억을 앞두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광고였다. 화려한 영상과 유머 코드로 가득한 요즘과 달리, 그 당시만 해도 흔한 광고조차 가슴을 찡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때 공익광고라는 신조어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커다란 광고사진에는 고향 집 툇마루 앞 섬돌 위에 가지런히 크고 작은 신발들이 놓여있다. 추석 아침, 사진 속 신발의 주인공들이 벌일 아침 명절상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안방에는 삼대에 걸친 식구들이 차례를 마친 후, 따듯한 토란국에 풍성한 음식을 나눠 먹고 있을 것이다. 비록 흑백사진 한 장이었지만, 정겨운 총천연색 장면을 연상시켜 주는 즐거움이 있었다.
둘째 사위가 그 아침에 함께 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산가족이어서, 해마다 명절 이 맘 때면 북녘 땅이 아득히 건네 보이는 임진각 망향의 동산에서 어쩌면 살아계실 지도 모르는 부모님을 기억하며 명절 문안을 드리기 때문이다. 한 마디 광고문안 일망정, 한가위의 들 뜬 기분에 취한 이웃들의 가슴을 젖게 만들어준 감동은 둘째 사위의 빈자리만이 아닐 것이다. 명절을 맞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식구들의 모든 빈자리에는 저 마다 남다른 사연이 있을 터이다.
벌써 돌아 온지 10년 훌쩍 넘었지만, 명절을 맞으면 예전 독일에서 목회하던 때가 떠오른다. 명절 무렵은 항상 부담스러웠다. 모두들 명절 신드롬을 겪으며, 참 우울해 하였다. 명절은 해마다 두어 차례씩 되풀이되면서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대가족의 부재’라는 상실감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 빈자리는 남편도, 아내도, 한국말이 서툰 자녀들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꿀꿀함이었다.
그 무렵에 들은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독일에서는 이 나이 되도록 생일 차려 먹는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당시 회갑이란 나이가 짧아서가 아니라, 고향생각이 간절하게 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긴 객지생활이라는 것이 늘 맴돌던 그 자리의 시간이어서, 시절은 변함없이 청춘이고, 마음은 언제나 철부지인 까닭이었다. 진정한 고향이 사라져 가는 글로벌 시대라지만 외국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는 유난히 타향살이의 명절향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 안쓰럽다.
올해도 3천 만 명이 넘는 귀성객이 추석을 쇠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벌일 것이다. 귀성행렬은 우리 민족만의 풍경이 아니다. 중국인들의 고향방문은 규모에서 보듯 훨씬 장엄해 보인다. 서양인들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면 귀성객이 된다. 수 천 년을 기다려온 유대인이나, 여전히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인의 향수는 어쩌면 불가사이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아버지의 집, 어머니의 품은 영원히 반복할 귀성행렬이다.
유년시절, 알 암 모아 삶은 밤으로 주머니마다 불룩하고, 추석빔으로 얻어 입은 새 옷의 까끌함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지던 좋은 날, 명절은 우리네 삶의 공통된 그리움이다. 올해도 고향과 부모님을 찾는 이들은 참 복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실 돌아갈 부모님의 집이 있다는 것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다.
송병구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