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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1]
 
 
 
     
 
 
 
작성일 : 14-08-26 23:41
   
넌 뭐가 다르냐?
 글쓴이 : dangdang
조회 : 327  


넌 뭐가 다르냐?


30 여년 전 갓 목사가 되었을 때 교역자 회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 그 모임의 가장 어른인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의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그 선배는 뜻 밖에도 나에게 “지성수! 너는 뭐가 다른거야?”라고 물었다. 그 분의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선배와는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이름이나 기억해주면 다행일 정도의 사이였는데 그런 질문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우물 쭈물 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는 그 분이 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 때부터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농촌 목회를 거쳐 80 년도에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신장에서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들인 풍산교회 목회를 할 때였다.


교회 바로 옆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정 선생이라는 분이 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모임에 나갔던 분이었다. 나와 대화를 몇 번 해보더니 ‘당신 생각이 어쩌면 우찌무라 간조의 생각과 그렇게 같으냐?’고 하면서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많이 읽었느냐고 했다. 우찌무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일본 기독교의 철저한 비주류이면서도 일본 기독교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였다. 그러나 사실은 부끄럽게도 나는 여기 저기서 우찌무라 간조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지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어 보지를 못했었다. 왜냐하면 진작부터 그의 책을 읽어 보고 싶었지만 그 때까지는 책 한 권을 사서 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사정을 안 정 선생이 고맙게도 우찌무라 간조의 전집 20권을 사주어서 몇 해 동안 통독을 했다. 우찌무라의 책들은 그동안 내가 기독교에 대하여 막연하게 품었던 의문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찌무라는 서양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왜곡, 굴절된 교파 기독교는 이질적인 전통을 가진 일본의 토양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일본이 외국에서 진리의 싹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일본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배양되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 우리 자신과 우리 동포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 기독교는 “일본인 특유의 관점에서 해석된 기독교의 진리”여야 하며, “어떤 외국인의 중재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본인들이 직접 받은 기독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찌무라는 철저한 자립정신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외국 선교사들이 진정으로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원한다면 먼저 일본의 기독교가 재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찌무라는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독립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지만 외국 선교사들의 명령에 따라 살지 않을 것이며, 외국인에게 돈을 빌려 쓰면서까지 선교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당시 일본 교회가 미국에서 돈을 가지고 온 선교사들에게 의존해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독립 전도’를 주장했다.


그 때까지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찌무라 간조가 종교를 직업으로써 갖는 것을 가장 경멸했다는 것이다. 우찌무라의 생각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당시의 내 형편과 맞아 떨어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풍산 교회는 1년 예산이 300 만 원도 안되는, 그것도 어린 노동자들이 한 달 동안 뼈가 휘도록 철야로, 야근으로 벌어서 헌금을 낸 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월 10 만원의 생활비로써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지만 그 돈도 가냘픈 여공들이 뼈를 깎으면서 번 돈의 십일조가 모아진 것이어서 생활비를 받을 때 마다 “저 애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어떻게 하면 내 손으로 벌어먹고 살면서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취직을 하게 된 것이 봉제 공장 총무과장 자리였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양구교회 3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교회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받아 보지 못하고 지냈다.


비록 우찌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당시로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회를 하기는 하되 현실적이면서도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하고 늘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본의 아니게(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목회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빈민촌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교단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매일 매일을 생활과 생각들을 글로 써서 한 달에 한 번씩 ‘빈들의 소리’라는 20 쪽짜리 소책자로 발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찌무라 간조의 ‘성서연구’,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을 흉내 낸, 개인이 발행하는 흔치 않은 신앙잡지였다.


이렇게 해서 발행하기 시작된 ‘빈들의 소리’는 신학대학에 배포되어 신학생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자연히 그들이 맡고 있는 여러 교회의 학생회, 청년회의 주보에 단골로 인용되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이 기피하는 교회 안에서 유통되는 ‘지하 유인물’이 된 셈이었다. 결국 ‘빈들의 소리’ 그 후 10 년 동안 나의 칼이요 방패이자 올무가 되었다.


원래 신학을 한다는 것은 돈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사람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실에선 그럴 수가 없다. 더욱이 전문화되고 규격화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성경구절을 끌어들여서 아무리 합리화, 정당화해도 예수 당시부터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은 경계 대상이었다. 예수에게 날마다 결투 신청을 했던 이들이 누구였던가? 당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잘 먹던 못 먹던 현실적 여건상 밥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종교인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보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목사가 이런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면 평생 추상적, 관념적, 비현실적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더 나가서 잘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전혀 무지하면서 교회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딱한 목사도 될 수 있는 법이다.


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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