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죽은 물고기들만 물결을 따라 헤엄친다
격언과 속담들은 나라마다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인간이 지닌 보편적 본성에 근거한 비슷한 속담들도 물론 많지만 각각의 나라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 사상 등이 반영된 색다른 격언들도 이에 못지않게 많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인상 깊게 만난 독일식 격언은 거리에 진열된 엽서에 프린트 된 다음의 글귀였다. “현실이 파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꿈을 자신의 영혼에 지니고 있는 자, 그는 진정한 부자다.” 곱씹을 만한 이 문장은 왠지 모르게 독일스러운 느낌을 주었었다.
두 번째로 만난 격언은 아이가 다니던 예술학교에서였다. 예술학교란 말하자면 시에서 운영하는 음악 미술 학원이었다. 거의 최하위 소득층인 유학생의 신분으로서 독일 사회 곳곳에서 누린 복지의 혜택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선생님과의 일대일 레슨을 포함하여 소그룹 미술반을 다니면서도 국가의 교육비 지원 덕에 거의 학원비를 내지 않고 다녔으니 말이다. 바로 여기서 그 격언을 만났다. 학원 건물의 엘리베이터 내부는 온갖 낙서와 그라피티로 가득 차 있었는데 바로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삶에 새겨질 두 번째 독일 격언을 만난 것이다. 그 격언은 이것이었다: “오직 죽은 물고기들만 물결을 따라 헤엄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다음과 같은 처세의 지침을 들으며 자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사람 많은 쪽으로 줄을 서라.” 결국 튀지 말고 시류에 따라 흐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은 오직 죽은 물고기들뿐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의 물결, 세속적 가치관과 문화를 거슬러 헤엄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지배하는 탐욕과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삶을 짓누르는 절망, 비관, 포기, 회의, 냉소, 조롱, 비아냥의 기운과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으면 그저 죽은 물고기처럼 물결에 따라, 시류에 따라 흘러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에서 주인에게 벌을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이었다. 최후의 심판(마 25:31-46)에서 저주를 받은 자들도 악을 행한 이들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은,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는 질문을 통해 악을 행하는 것이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약 4:17) 성경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영화 <도나니>의 한 대사는 또 다른 싸움의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싸움은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한 일은 없습니다.” (히 12:4)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