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 살겠다.
무엇이 가장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일까? 사람 마다 다를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면 경제도 살려야 하고 북한 핵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개인으로는 할부금도 갚아야 하고 시집 장가도 가야하고…., 등등.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은 ‘자기를 찾는 일’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천하 모든 것을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오죽하면 소크라테스 영감이 ‘네 자신을 알라.’고 캠페인을 벌리셨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도 잘 모르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단점이 많고 잘못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크게 망신 당한 일은 없이 살아 온 것은 참으로 요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솔한 편은 아닌데도 태어나기를 겁이 조금 부족하게(?) 태어났는지 모험심이 많아서 안해도 될 고생을 한 일이 많았다.
나는 사회적, 경제적 기준에서는 비울려고 해보아야 비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내 자신을 비우려는 생각은 늘 하고는 살지만 그렇지를 못해서 비우기는 커녕 늘 채우려고 하다가 허기져서 지낸다. 세상풍파를 남보다 훨씬 많이 겪고 살았는데도 아직도 자아가 죽지 않아서 자신을 들볶을 때가 많다. 머리로는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조금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면서 산다.
흔히들 자아를 연단하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한다고들 한다. ‘아픔’은 인간은 성장 시킨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혀 고생을 해 보지 못한 인간’ 에 대해서 부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경멸, 조소를 보내고 싶어진다. 한 마디로 “당신이 인생에 대하여 무얼 알겠나?” 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고통을 당해 봐야 철이 든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아도 고통을 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리를 빨리 깨닫는다. 그래서 고승들이 그렇게 개고생을 했던 거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리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고생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하게 되고, 자아가 연마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해서 사람이 망가진 경우도 많다.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인격이 왜곡되거나 비루해지거나 어둡거나 패배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수가 있는 법이다.
목사나 신부, 스님 같은 종교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부정적 결과를 빚어낼 가능성이 높다. 대학 과정을 마친 후 입학하는 정규 신학대학이 아닌 무인가나 군소 신학교에 갈수록 나이 먹고 사업에 실패하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일찌기 사명을 받았는데 전도자가 되지 않고 세상길로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아서 실패하고 늦게 다시 사명자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러나 내가 겪어본 경험에서 볼 때 이들은 대부분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했던 고생이 그들의 자아를 일그러트렸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피안적인 신앙을 강조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전하는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누가 전달하느냐 하는 메신저가 중요하다. 나는 가끔 설교를 할 때가 있는데 내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확신이 있지만 내 인격이 그 메시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느껴서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위선과 허식, 교만과 무지함이 뒤섞여 있음을 잘 안다. 책을 몇 권 냈지만 책을 낼 때마다 자신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함이 느껴져서 언젠가는 나 자신의 부끄러운 면, 어두운 면을 사실대로 드러내는 이를테면 참회록을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만일에 내가 그런 글을 쓴다면 살아 있는 동안은 발표될 수가 없을 것이고 죽어서도 한참 있다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대강 죽은 다음에나 발표해야 할 것이다.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들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두려울까? 인간은 누구나 발가벗겨놓으면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옷을 벗으면 망신스러운 일인 것처럼 인격의 옷, 영혼의 옷도 아무 때나 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때 진리나 정의에 대하여 열열했던 생각도 많이 무뎌지고 이제는 대강 산다. 거창하게 깨달음, 해탈,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수행과 훈련을 통해서 거룩해지거나 훌륭해지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너무 거룩하지도 않고(그럴 수도 없지만) 너무 죄를 많이 짓지도 않고(그러기는 쉽지만)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무엇이 가장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일까? 사람 마다 다를 것이다. 나라를 생각하면 경제도 살려야 하고 북한 핵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개인으로는 할부금도 갚아야 하고 시집 장가도 가야하고…., 등등.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은 ‘자기를 찾는 일’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천하 모든 것을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오죽하면 소크라테스 영감이 ‘네 자신을 알라.’고 캠페인을 벌리셨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도 잘 모르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단점이 많고 잘못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럭저럭 크게 망신 당한 일은 없이 살아 온 것은 참으로 요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솔한 편은 아닌데도 태어나기를 겁이 조금 부족하게(?) 태어났는지 모험심이 많아서 안해도 될 고생을 한 일이 많았다.
나는 사회적, 경제적 기준에서는 비울려고 해보아야 비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내 자신을 비우려는 생각은 늘 하고는 살지만 그렇지를 못해서 비우기는 커녕 늘 채우려고 하다가 허기져서 지낸다. 세상풍파를 남보다 훨씬 많이 겪고 살았는데도 아직도 자아가 죽지 않아서 자신을 들볶을 때가 많다. 머리로는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조금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면서 산다.
흔히들 자아를 연단하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한다고들 한다. ‘아픔’은 인간은 성장 시킨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혀 고생을 해 보지 못한 인간’ 에 대해서 부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경멸, 조소를 보내고 싶어진다. 한 마디로 “당신이 인생에 대하여 무얼 알겠나?” 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고통을 당해 봐야 철이 든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아도 고통을 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리를 빨리 깨닫는다. 그래서 고승들이 그렇게 개고생을 했던 거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리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고생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하게 되고, 자아가 연마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해서 사람이 망가진 경우도 많다.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인격이 왜곡되거나 비루해지거나 어둡거나 패배주의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수가 있는 법이다.
목사나 신부, 스님 같은 종교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부정적 결과를 빚어낼 가능성이 높다. 대학 과정을 마친 후 입학하는 정규 신학대학이 아닌 무인가나 군소 신학교에 갈수록 나이 먹고 사업에 실패하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일찌기 사명을 받았는데 전도자가 되지 않고 세상길로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아서 실패하고 늦게 다시 사명자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러나 내가 겪어본 경험에서 볼 때 이들은 대부분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했던 고생이 그들의 자아를 일그러트렸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피안적인 신앙을 강조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전하는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누가 전달하느냐 하는 메신저가 중요하다. 나는 가끔 설교를 할 때가 있는데 내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확신이 있지만 내 인격이 그 메시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느껴서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위선과 허식, 교만과 무지함이 뒤섞여 있음을 잘 안다. 책을 몇 권 냈지만 책을 낼 때마다 자신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함이 느껴져서 언젠가는 나 자신의 부끄러운 면, 어두운 면을 사실대로 드러내는 이를테면 참회록을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만일에 내가 그런 글을 쓴다면 살아 있는 동안은 발표될 수가 없을 것이고 죽어서도 한참 있다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대강 죽은 다음에나 발표해야 할 것이다.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나같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들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두려울까? 인간은 누구나 발가벗겨놓으면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옷을 벗으면 망신스러운 일인 것처럼 인격의 옷, 영혼의 옷도 아무 때나 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때 진리나 정의에 대하여 열열했던 생각도 많이 무뎌지고 이제는 대강 산다. 거창하게 깨달음, 해탈,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수행과 훈련을 통해서 거룩해지거나 훌륭해지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너무 거룩하지도 않고(그럴 수도 없지만) 너무 죄를 많이 짓지도 않고(그러기는 쉽지만)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