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22 사단 사고가 수사 중이다. 임병장이 제대 3개월을 앞두고 사고를 저질렀으니 이번 사고는 대한민국 모든 병사들이 한결같이 굳게 믿고 있는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는 믿음도 효용성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군대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제한된 공간 안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숙하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수십 명 씩 떼려 넣어서 하는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이해와 관용 보다는 명령과 복종만 있고 어디로 도망도 갈 수도 없는 내무반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대립을 풀 수 있는 길이 있겠는가? 큰 부정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는 전방의 작은 소대 병력이 근무하는 자유라고는 숨 쉴 자유 밖에 없는 곳에서 갈굼까지 당하면 견딜 재간이 있겠는가? 결국 그런 갈등의끝은 전우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총격전으로 끝판이 났다. 아마도 군대의 내무 생활은 대부분의 징집된 대한민국 남성의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40 년 전 나 역시 내무생활이 괴로워서 월남을 자원해서 갔었다. 비록 내가 참가한 몇 번의 작전에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다른 작전에서 피아간에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간혹 들었다. 자기가 출동한 작전에서 적군인 베트콩이 죽었을 때 전공 세우기에 눈이 먼 병사가 아니고서는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기분 좋게 여기는 병사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전쟁터에서 일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은 죽이고 싶은 마음 보다는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더 많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지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혹시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주지나 않나 하는 바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누구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실제로 상대를 죽여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고 실제로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남을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그 때가 내가 죽어야 할 때인 것이다.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다.
죽는 습관이란 자기를 부정하는 습관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남을 부정하면서 산다. 특히 부부싸움을 할 때 보면 그렇듯이 남을 부인하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쉽지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소태보다 쓰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긍정하려는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통 징그럽게 자기를 긍정하는 사람들뿐이다.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예수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들면서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점잖게 말해서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가 가진 그 많은 소유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야기는 깡패들이 싸울 때 “너 오늘 밥숟가락 놓고 싶어?”하는 표현과 똑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잘났어! 정말."인 것이다.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예수는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을 잘 알았다. 즉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게 나간 것이다. 예수는 자기 긍정 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단순 무식하게 자기부정을 가르친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지만 가장 중요한 전쟁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싸울 때마다 지는 싸움을 한다면 싸움을 포기하고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늘 지고 살아서 아예 긴장을 느끼지를 못하고 산다.
'나와 너' 사이의 싸움은 말릴 사람이 있지만 '나와 나' 사이의 싸움에는 말릴 사람이 없다. 말릴 사람도 결국 나인데 방법을 모르면 말릴 수가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깨닫는다'는 것을 서양식으로는 해석학이라고 한다.
해석학의 특징은 파괴력이다. 자기긍정을 뒤집어 자기부정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써먹었던 방법이다. 깨달음의 특징은 부서짐 즉, 파괴이다. 즉,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