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의 새로운 만남: 한국신학의 재탄생을 고대함
손 원 영/서울기독대학교 교수, (사)한국영성예술협회 대표
올해는 동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최제우(崔濟愚, 1824.12.18-1864.4.15)의 탄생 200주년 되는 해이다. 평소 ‘풍류도’(風流道)와 ‘동학’(東學)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신학자로서 필자에게 최제우의 탄생 200주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모쪼록 최제우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바라기는 한국신학과 동학사상 사이의 학문적 대화가 보다 더 깊어져서, 아직도 일천한 한국신학의 지평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신학과 동학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한국신학의 재탄생을 고대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꿈을 꿔본다.
첫째, 한국신학은 동학과의 대화를 통해 일종의 ‘신서학’(新西學)으로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기를 바란다. 사실 여기서 신서학이라 함은 김상일 교수의 용어이다. 그는 일찍이 『동학과 신서학』(2000)이라는 책에서, 최제우 당시의 신학과 21세기 지금의 신학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최제우가 활동하던 19세기 중엽의 신학은 서양제국주의와 동일시되던 서학으로서 최제우의 동학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최제우가 『동경대전』에서 밝힌 당시 천주교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났다.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조리가 없고 도무지 하느님을 위한 속심이 없고 오직 제 몸을 위한 술책을 바라며 몸에는 기화의 신비가 없고 학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없고 형식만 있지 실속은 없다. 이와같이 하느님을 위하지 않으므로 도는 허무에 가깝고 학은 하느님을 떠났다.”(논학문)
이처럼, 최제우가 날카롭게 비판하는 당시 서양의 신학은 철저하게 타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신학이요 또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서학이었다. 이제 이런 신학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 그리고 최제우 사후 약160년이 지난 지금, 현대 기독교 신학은 최제우가 비판했던 당시의 제국주의적인 ‘서학’이 더 이상 아니다. 김상일 교수의 주장처럼, 그것은 ‘신서학’이 되었다. 그래서 신서학은 자유와 평등, 온 생명과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나라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동학의 근본사상과 상당 부분 핵심가치를 공유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신학은 여전히 최제우가 비판했던 ‘서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한국의 신학은 이제라도 19세기의 ‘서학’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신서학’으로서 동학과 진지하게 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적 지평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신학은 일종의 동학 곧 ‘한국학’으로서 지역학적 특성을 반영시켜 신학 연구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 동양철학자인 조성환 교수에 의하면, 최제우가 창안한 동학은 일종의 지역학으로서 ‘한국학’의 다름 아니었다. 즉 최제우의 동학은 중국학에 대한 학문적 독립선언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최제우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설명하면서, 동학의 개념을 설명한 것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최제우에게 천도(天道)와 서양의 도(道)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묻자, 최제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천도(天道)이지만,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나의 도는 여기에서 받아서 여기에서 펼치는데, 어찌 ‘서’(西)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김용휘, 『최제우의 철학』, 2012, 125-126)
최제우가 제창한 동학의 동은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과 구별되는 동방으로서의 ‘조선’을 뜻한다. 말하자면 최제우의 천도와 동학은 지구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이 융합된 의미로서, 천도가 지구적이라면 동학은 지역적 개념이 된다.(조성환. 이우진, “‘동학(東學)’ 개념 탄생의 사상사적 의미”, 『유학연구』, 제58집, 2022, 136) 물론 위 대화에서 암시되듯이, 동학은 지역적으로 서양학문으로서의 ‘서학’에 대한 상대적 의미도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의 의미는 중국의 동쪽이란 의미로서, 동학은 중국학과 대비되는 한국학의 의미이다. 따라서 동학의 동은 한국이라는 학문의 장소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동학은 한국이란 장소와 연관된 일체의 문제를 탐구하는 한국학을 뜻한다. 이것은 신학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신학은 형이상학적 문제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장소 곧 컨텍스트(context)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신학은 동학 곧 한국학으로서 대한민국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과 더욱 치열하게 씨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학으로서의 신학은 대한민국이 직면한 당면 과제인 분단극복과 통일, 지역갈등과 다문화, 그리고 기후위기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학으로서의 신학은 지금 교회의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논의가 주춤해진 통일신학, 기후위기신학, 해방의 신학, 그리고 대화의 신학 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셋째, 새로운 한국신학은 21세기 통일한국과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여 최제우의 동학과 대화함으로써 제3풍류도로서의 ‘글로벌 K-신학’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유동식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화랑의 비문 『난랑비서』(鸞浪碑序)에 반영된 ‘풍류도’를 화랑의 정신으로 설명하면서 그 풍류도를 중심으로 한 ‘풍류신학’을 창안한 바 있다.(유동식, 『풍류신학으로의 여로』, 1988) 그것은 유불선(儒佛仙) 삼교를 회통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최치원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풍류도를 간과하였다. 그러다가 최제우에 이르러서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풍류도 정신은 다시 꽃을 피게 되었다. 그래서 최치원의 풍류도는 제1풍류도요, 동학은 제2의 풍류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김범부의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최제우의 동학이야말로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말한 풍류도의 재탄생, 곧 “신도(神道) 정신의 기적적 부활” 혹은 “국풍의 재생”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김범부/김정근풀어씀, 『풍류정신의 사람, 김범부의 생각을 찾아서』, 2013) 따라서 최치원의 ‘화랑풍류도’(花郞風流道)에 근거하여 유동식 교수의 ‘풍류신학’이 탄생했듯이, 최제우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동학의 ‘시천주풍류도’(侍天主風流道)를 토대로 하여 또 다른 이름의 제3풍류도인 새로운 한국신학이 등장할 때이다. 그것은 명실공히 ‘글로벌 K-신학’의 재탄생의 다름 아니다.
19세기 동학과 서학의 만남은 수운의 처형 이후 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안타깝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21세기 동학과 신서학의 만남은 결코 과거처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한류와 K-문화의 전세계적 확산 속에서 신동학과 신서학의 만남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글로벌 K-신학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기후 및 지구 위기의 극복을 위해 한국학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