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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7-10 23:52
   
십일조 논란에 대해서(2)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70  


십일조에 대해서 (2)


※ 지난번 십일조 논란에 대한 글을 올렸고.. 그에 대한 이의제기들이 있어 답변형식으로 2차적인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이제 그에 대하여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중심으로 십일조 논란에 대한 글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비판을 기대합니다.


1. 오늘날에도 과연 십일조가 필요한가 하는 데 대해서는 저는 여전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정신이고, 무엇보다 주님께서 십일조와 관련하여 꼭 그렇게 하라고 명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두 개의 국역 본문을 소개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개정개역) //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새번역)


2. 주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신 마태복음 23장은 사실,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려고 목적했던 장이 아닙니다. 23장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외식행태를 나무라시던 중에 언급되었던 것으로, 그 중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기만적인 십일조행태를 비난하시고자 언급하신 내용은 극히 짧은 구절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가식을 나무라시면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유념할 것이.. 너희는 하루살이 같이 작은 것들은 걸러내면서도, 정작 중요한 신앙적 덕목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체 하는구나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드려야 할 참된 신앙적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신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만 말씀하셨다면, 오늘날의 십일조에 대한 시비가 일정 정도 정리되었을 것입니다만, 이에 덧붙여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그 '하루살이'라고 평가되는 아주 작은 십일조덕목 역시도 버리지 말고 반드시 실행할 것을 주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실행하기도 어려운 가치적 덕목('낙타'라고 표현된)을 반드시 실행하라고 하셨다면, 실상은, '하루살이'같이 지극히 작은 가치는 '낙타'에 묻혀 그 의미가 상실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는데 놀라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몇 몇 분들이 주장하시는 대로 전인격적인 신앙적 헌신만을 촉구하시는 것이 주님의 의도였다면, 하루살이 같이 보잘 것 없는 덕목들은 그 상위개념으로 인하여 하위개념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게 되고 의미상으로도 쓸모없게 됨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4. 그런데 주님은 그러질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기에 주님의 귀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듣고 보고 배운바가 많아서 립서비스를 참 잘합니다. 소위 말해서 이상론적인 발언들을 잘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행동은 오히려 그 반대로 '하루살이'만도 못한 행태로 일관하는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말하자면, 말하고자 하는 이상과 행동하는 현실적 삶 사이에 커다란 괴리를 느끼면서도 아무런 불편을 못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 탓하며 그저 그렇게 자기를 위안삼고 변명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5. 사실상, 주님께 욕먹었던 그 바리새인들 역시도 평상시에 이런 립서비스 발언들을 참 많이도 남발하면서 남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상은 자신들이 내뱉었던 그 이상적인 말들(주님께서 지적하신)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리곤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의 행태와 정말 아주 닮아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사악함을, 그 부정직함을, 그리고 그 가식적인 영적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덕목들 - 신, 의, 인 - 을 반드시 지키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근데 놀랍게도, 그 이상적인 덕목들을 제시하시면서도, 그 하위개념인 박하나 근채나 회향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십일조('하루살이') 역시도 버리지 말고 반드시(should, ought - 모든 영어성경이 그렇게 쓰고 있고, 또한 헬라어 원문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이행하라고 하십니다.(참조. 23:23, "(전략) ..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neglecting the former. NIV)


6. 그렇다면, 왜 주님은 '낙타'에 비해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하루살이' 같이 보잘 것 없는 덕목들조차도 포기치 않으시고 성도로 하여금, 교회로 하여금 반드시 지킬 것을 명하셨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바로 교육적 차원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100원에서 10원 떼서 십일조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어차피 100원 가지고는 거의 아무런 사용처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만일 10만원에서 1만원 떼는 것은 어떨까요. 약간 고민은 되겠지만.. 그래도 뭐 그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000만원에서 100만원 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점점 더.. 부담스럽고 마음이 긴장되지요. 인간이라면 할까 말까 망설이게 마련입니다. 그럼 1억은요. 더구나 10억 정도로 단위가 올라가면 죽고 싶겠지요. 아주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처음 마음먹은 것과 달리 액수가 올라갈수록 나의 실행력은 현저하게 떨어져 마음(이상, 믿음)처럼 잘 안됩니다.


7. 그러나 어려서부터, 100원부터 하나님께 십일조 떼기를 배웠고 늘 실천해 왔던 아이는 청소년이 되고 장년층이 되어 액수가 올라가더라도 꿋꿋하게 십일조 내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잘 수행하였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전인격적인 헌신과 같은 낙타들도 거뜬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하는 분들이나 장로님들도 잘 아시는 대로 교회는 영적 교육기관입니다. 교육은 훈련을 말하며, 과정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과정이 없는 성숙은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말씀하기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6,7절) 하셨습니다.


8. 이것은 개인만이 아닌, 공동체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나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 혀를 찹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주변에서 그런 교회들.. 많이 보지 않나요. 그리고 한편으로 아주 성숙하여 전인적인 헌신을 이끌어 내는 교회들도 주변에서 더러 볼 수 있고 말입니다. 대단하다고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교회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신약성경에 등장했던 열정적인 헌신의 현장들을 가졌던 교회들은 지금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당대의 교회들을 더 이상 우리는 현실적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부흥과 침체의 부침을 누구나 겪을 수 있고, 그래서 때로는 '낙타' 같은 믿음으로 치고 올라가기도 하지만, 때론.. '하루살이' 같은 덕목조차도 힘겨울 때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아셨던 것입니다.


9. 흔히들 알고 있기로, 구약과 신약은 단절돼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단절돼 있지 않고 아주 튼실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도 되시고, 신약의 하나님이 구약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이 신약의 그 어떤 성경보다 잘 나타나 있고, 드러나 있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참으로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관계하시면서 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구약성경은 참으로 여실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서 아파하시는 모습과 분노하시는 모습, 또는 축복하시는 모습이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신약의 백성이랄 수 있는 교회와 다를 것이 있습니까.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어떻습니까. 구약의 백성들과 다르던가요.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10.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신약의 시대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부질없는 일이 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단정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결단코 하나님 이외에는요. 물론 주님께서 새롭게 해석하셨거나, 자기 몸을 내어 주심으로 전혀 새로워진 구속적 방식이 된 사건에 있어서는 옛방식인 구약의 제사제도가 불필요한 일이 되겠으나,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사실조차도 침소봉대하여 신약적 해석이라는 구실 아래 구약의 것이라 하여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가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구나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적 행위라는 차원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11. 누가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모두 나실인이고, 레위인이고, 선지자이고, 제사장입니다. 맞습니다. 특히 레위지파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른 것이 지금은 세습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적인데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과 절차를 잘 밟는다면,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목사가 됩니까. 사명감이 있어야 목사가 됩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 거기에서 하나님의 분깃으로 살아갑니다. 분명 구약의 레위지파는 아니지만, 의미상으로 레위지파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2. 하나의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교회'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해당되지 구약에는 해당될 수 없는 용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모세의 광야시절을 "광야교회"(행 7:38)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교회라니요. 예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피로 낳으신 것이 교회인데, 이 '교회'라는 말이 구약에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도 구원사라는 관점에서는 동일한 교회라고 보신다는 뜻입니다. 즉, 구속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십일조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이상, 폐기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폐기하지 않은 이상, 교회로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해서 두신, 폐기치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아주 작은 기초 덕목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교회의 영적인 교육과정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절)


김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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