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orgive Us Our Trespasses, 2022)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한 사회의 도덕성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알 수 있다.” 러닝 타임이 고작 12분밖에 되지 않는 단편 영화는 이렇게 묵직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과 함께 시작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누가인가? 나치의 죄악에 맞서 자신의 생을 불살라 하나님께 바쳤던 신학자요 목사가 아닌가. 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 짧은 영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역시 나치의 죄악을 다룬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나치의 죄악이 절정에 이르렀던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났던 은밀한 죄악의 출발점을 다룬다. 모든 죄악은 언제나 시작이 있다. 소도둑이 갑작스럽게 소도둑으로 등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소도둑은 언제나 바늘로부터 출발한다. 수백만 명의 무고한 인간을 주저 없이 학살할 수 있었던 믿음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학살의 시작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먼저 내 눈의 티를 빼고 난 후 남의 눈을 뽑겠다는 심산이었을까? 우생학적 관점에서 아리아 민족을 무흠무결한 최고의 인종으로 여겼던 나치는 다른 열등한 인종으로 눈을 돌리기 전에 자신들 아리아 민족 내에 존재하는 흠결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을 안락사 시키는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다. ‘T4 작전’이라 불렸던 이 프로그램은 신체장애인들과 지적장애인들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거나 강제로 안락사 시키는 정책이었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사회가 소위 합법적으로 진행한 야만이었다. 1939년부터 시행된 T4 작전을 통해 30만 명의 장애인이 살해당했고 40만 명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했다. 이 학살은 앞으로 수백만으로 이어질 대학살의 분명한 전조였다.
영화는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선생님은 장애인을 돌볼 때 드는 비용이 비장애인들의 일상생활 유지비에 비해 얼마나 큰지, 그로 인해 독일인들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를 예시로 들면서 아이들이 산수 문제를 풀게 한다. 장애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인 교사가 자발적으로 이 일을 했을 리 없다. 국가의 강제적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 이 악의적 방침 아래서 국가적 손실에 생각이 미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선생님께 던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대답을 못 하고 주저하는 선생님 대신 뒤쪽에 앉은 제법 큰 아이가 무심하게 대답한다. “죽여야지.” 무심함을 수반한 악만큼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 있을까? 이 무심한 대답은 결국 이후에 벌어질 거악의 시발점이 될 것이었다.
마침내 군인들이 그녀의 아들을 잡으러 온다. 이 모든 일을 예측하고 가능한 대로 준비했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도망가라 외치고, 장애를 지닌 아이는 눈 쌓인 들판을 향해 불안하게 내달린다. 영화의 끝에서 자막은 T4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살을 위한 가스실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참상에 대한 긴 자막은 다음의 말로 끝을 맺는다. “피해자의 대다수는 아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 태어나신 계절에도 대량의 학살이 일어났다. 그 역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더러운 권력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때에도 역시 모든 피해자는 아이들이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또래의 학살을 경험하신 예수님은 가장 온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무시당하고 유린당하는 모습만큼은 참으실 수 없었다.(막 10:14)
짧은 영화는 가치를 기준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모든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낯선 이야기는 단지 과거에 일어난 참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비슷한 일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들을 여전히 우리는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해 드릴 우리의 기도 역시 여전히 이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