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얼굴 보기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을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할 때 나는 단연코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엥? 얼굴이라니? 한 번 생각해 보자.
사실 면적으로 따지자면 사람의 얼굴은 고작 가로 20 cm 세로 30 cm에 불과하다. 그 작은 면적 안에서 눈, 코, 입의 거리, 간격, 배치 구조에 따라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판단되고 수 만 가지 복잡미묘한 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미움과 사랑은 물론 심지어는 자살이나 살인까지 벌어짐은 물론 역사까지 달라 질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것도 영원불변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가면서 변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이 아니라고 할수 있겠는가?
최근에 한국 사람들 때문에 천국에 주민등록증 대조 시스템이 도입되었다고 하는 소식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성형을 하도 많이 해서 본인 확인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란다.
얼굴에 대해서 가장 심오한 이야기를 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 임마뉴엘 레비나스이다. 그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태인으로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자신도 독인군의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 전쟁이 끝나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개 보다 못한 취급을 받다가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집 기르던 개가 자기를 반길 때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개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낮선 사람에 대해서 항상 기대를 걸고 바라보고 있는데,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계시'라고 부른다. 다른 말이 아니고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얼굴과의 만남은 절대적 경험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한 편, 내게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나도 얼굴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타인의 얼굴을 피하거나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얼굴을 감추어서도 안된다.
얼굴과 머리는 다르다. 머리는 하나의 물체지만, 얼굴은 표정을 말하고 그 표정 안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다. 그래서 얼굴은 우리에게 '호소'하고 메시지를 주고 느낌을 전달한다.
사람의 얼굴에서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부분이 어느 부분일까? 언뜻 생각하면 눈일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란다. 뜻밖에도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입술이라고 한다. 성형외과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근육은 입술 주변의 근육이라고 한다. 말 할 때는 말 할 것도 없고, 먹을 때, 웃을 때, 울 때를 비롯해서 보통 가만히 있을 때도 입술 주변의 근육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쉴 사이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 웃는 것 다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입을 비쭉거리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 저절로 주둥이부터 튀어나온다. 이렇듯 인간은 희로애락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통하여 표현하기 마련이다.
사진관에 가서 정식으로 폼 잡고 사진을 찍을 때, 특별히 독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몰라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입술이 아니던가? 눈이야 감지만 않으면 되지만 입술을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했던 경험들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이 나온 다음에 보면서 ‘그 때 내가 왜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종종 있게 된다.
이렇게 표정이란 대부분이 입술의 모양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자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생각해도 그 때 그 때의 마음이나, 생각에 따라서 입술 주변의 근육이 저절로 움직여서 어떤 표정을 만들게 되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 마음으로 결심을 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든가 하는 것이다.
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인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에서 70 세가 된 노인 수사가 한 이야기가 무엇 보다 인상적이었다.
“이곳(수단) 사람들은 잘 울지 않아요. 아파도 슬퍼도 사람이 죽어도 좀처럼 울지 않아요. 그런데 신부님이 죽은 소식을 듣고 우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가 있어요."
2006년 월드컵 본선에서 아프리카의 토고와 한국이 첫 게임을 치뤘다. 토고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 경기가 자기 생애에 중대한 경기일 터인데도, 게임이 불리하게 되어도 골 킥이 아슬아슬하게 실패를 해도 선수들의 얼굴이 마치 감정 없는 로봇처럼 그냥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던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에게도 일상의 삶에서 너무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 사람들은 왠만한 일에는 울지를 않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경험이 있었다.
20 여 년 전 주일 마다 미아리에 있는 시립 고아원을 찾아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매주 가서 만나는 아이들이지만 도무지 소통을 할 수 없는 어떤 두꺼운 벽 같은 것을 항상 느끼곤 했다. 원생들이 예배에 나오기는 하지만 도무지 표정도 없고 반응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때도 그랬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응이 없는 박제가 된 얼굴 같았다. 심지어 아이들은 아파서 병원을 가서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그냥 ‘괜찮다’고 대답을 한다. 왜냐하면 남이 자기에게 가져주는 일체의 관심을 진실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고 3 짜리 남자애가 갑자기 죽었다고 연락을 받고 동부 시립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영안실에는 원생들 중에서 중학생 이상의 원생들과 보모들, 그동안 원생들의 학습을 돌보아 주던 자원 봉사자 대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영안실에서 화환은 커녕 사과 한 쪽 없는 영결식을 하고 벽제 시립 묘지에 가서 하관식까지 했다.
일생 동안 따뜻한 방에서 잠 한번 못자보고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 한끼 먹어보지 못한 아이가 고아원에서 일생을 보내고 땅에 묻힌 것이다. 냉정을 유지해서 경건하게 예식을 집전해야 할 나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겨우겨우 하관식을 마쳤다. 그러나 대학생들, 보모들이 모두 울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생활을 해왔던 원생들은 끝내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남을 위하여 울어 줄 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