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목사와 설교 기술자
설교는 목회활동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능력 있는 목사치고 설교를 잘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교 잘하는 목사는 일단 능력 있는 목사로 인정받는 것이 보통이기도 하다. 그러니 목사라면 대개가 설교 잘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설교가, 매사가 다 그렇듯이 그냥 저절로 잘되진 않는다. 따라서 목사들은 설교에 온힘을 쏟아 붙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자기 설교에 내심 만족해하며 뿌듯한 마음을 향유하기도 하고, 불만스러워 침울한 마음이 되기도 하는데, 어떻든 설교가 일상처럼 되다시피 한 이들 목사로서는 이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어쩌다 한 번이라도 설교를 하지 않게 되면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다면 설교가 목회에 있어 왜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설교가 뭐기에 그리 된 것일까.
나는 설교학이 말하는 설교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 아닌 교인들이 성도가 되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은 안다. 성도로서 성숙해 가도록 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은 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인들 각자가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롬12:1)로 만들어 가도록 돕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교인들이 ‘드릴 영적 예배’(롬12:1)라 했으니 이에 이견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자기가 폭넓고 깊이 있게 아는 성경을 교인들에게 피력하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도 없지 않다. 교인들을 향해 하는 설교인데, 중심이 자기에게 기운 면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설교를 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온화하며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는 설교에서, 그러지 못한 사람은 입을 바늘로 꿰매버려야 한다는 막말을 하기도 한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강조해 오고도 자기의 가족이 위중하다는 소식에 차를 시속 160km이상을 달렸는데 과태료를 물지 않았다는 식의 무용담 비슷한 이야기를, 그것도 설교를 통해서 말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이기 전에 사람이어야 하고, 목사는 목사이기 전에 크리스천이어야 한다. 사람 아닌 크리스천은 있을 수 없고, 일반교인들만도 못한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무슨 말인가. 살아 있는 몸을 제물로 해서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고, 그렇게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 다시 말해서 최상, 최고의 예배라는 말 아닌가.
그럼에도 일상의 삶보다, 생활보다 설교와 그 준비에 더 무게를 두는 목사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하여 설교를 잘하게 되면 능력 있는 목사인가. 아니면 설교 기술자에 불과한 것인가. 귀를 즐겁게 한다고 은혜로운 설교인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듣기 좋으면 좋은 설교인가. 감명을 받으면 다 참다운 은혜인가.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 진짜 은혜 아닌가.
좋은 설교, 훌륭한 설교는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다. 교인들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부터 하지 않는다면 좋은 설교가 될 수 없다. 설교를 했으면 그렇게 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교인들보다 훨씬 더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나는 목사이니 교인들보다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착각이다.
설교 기술자가 되어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고 자기를 유능한 목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러고 그런 목사를 유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양자가 다 오산이고 착각이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눅6:44)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마7:21) 것, 그러니까 삶이 열매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족처럼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주일 대예배 시간에 드리는 장로들의 (대중·대표) 기도가 한결같이 원고를 보고 하는 교회도 있다. 원고를 읽는 기도이다 보니 실수가 적다. 그런데다가 내용도 성경적이어서 알차다. 그러나 맹점도 있다. 자기의 신앙과는 상관없이, 따라서 그리하려고 하는 의지도 별로 없이 신앙적으로 좋은 말을 총동원하여 설교자가 설교원고를 작성하듯 진땀을 흘려가며 쓴 원고를 배우가 연기를 하듯 감정을 살려 읽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원고를 보고 하는 기도가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이면 열 장로가 모두 원고를 의지하는 교회가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한다.
흔히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한다. 절대자 하나님께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구할 것은 구하는 것이 기도이다. 찬양도 기도의 중요한 영역이다.
어떻든 개인 기도라면 ‘산’이라 할 것을 실수로 ‘강’이라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산’으로 들으신다. 그러나 대중·대표 기도라면 사정이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이런 경우라도 기도자의 마음으로 들으신다. 그러나 대중은 그렇지 않다. 실수를 알아채고 고쳐 듣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원고를 읽는 기도여야 할 필수조건은 되지 못한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것이 있다.
문제는 설교가 됐건 대중·대표 기도가 됐건 그것을 왜 하느냐에 있다. 하는 자도, 들음으로 동참하는 자도 본질부터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임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