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기도에 배부르기
유명한 기도문들이 있다.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존 웨슬리의 ‘한 주간을 위한 기도’ 그리고 맥아더의 ‘아들을 위한 기도’가 대표적이다. 어떤 내용은 공공의 벽면을 장식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 바쁜 짬을 위로하는 일용할 묵상이 된다. 사람들에게 기도는 때론 밥이고, 시이며, 꽃과 같다. 세월과 함께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다시 기도가 되고, 삶의 무늬가 되는 그런 기도가 부럽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소음이 많은 사회처럼 몹시 소란스럽다. 기도 역시 그들의 분주함을 빼어 닮았다. 화살기도도 벅찬 사람들에게 침묵하기와 경청하기는 호사일 수 있다. 소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무슨 침묵이냐는 항변도 나올 법하다. 장 라프랑스는 <마음의 기도>에서 “만일 너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침묵을 사랑하는 자 되어라”고 하였다.
어떤 방법이든 사실 한 몫에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없다. 마치 밥 고봉 한 그릇이라도 겨우 한 끼용이듯, 사나흘 배부를 수는 없다. 기도 역시 그 나름의 분량만큼일 뿐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체포를 앞둔 바로 그 밤을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느 제자의 요청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눅 11:1). 오늘 우리에게 전해온 주기도문(主祈禱文)이다. 날마다 드릴 기도로 골고루 영양가를 담아낸 이만한 기도문이 있을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을 들라면 예외없이 ‘일용할 양식’을 꼽는다. 이 네 번째 간구를 가리켜 주기도문의 중심이고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신학자(로마이어)도 있다. 실은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가장 솔직한 기도 그 자체이다. 십자가에 담긴 ‘일용할 고난’(눅 9:23)처럼, 주기도문은 하루 한 끼 한 끼 절정을 담아내었다.
마틴 루터는 <소교리 문답>에서 “일용한 양식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대답한다. 같은 방식으로 헤아린다면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은 무엇일까? 루터의 혜안은 일용할 양식의 목록을 따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라고 규정하였다. 심지어 선한 정부와 좋은 날씨는 필수적이다.
균형잡힌 식단은 아니라도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이 요구된다. 하루 먹고 사는 일을 위해 ‘일용할 용돈, 일용할 잠, 일용할 칼로리, 일용할 물, 일용할 커피, 일용할 휘발유’는 기본이다. 하루 일과를 위해서는 ‘일용할 기억력, 일용할 메모, 일용할 독서, 일용할 격려, 일용할 욕, 일용할 핸드폰 통화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루의 의미를 더한다면 ‘일용할 감사, 일용할 운동, 일용할 꿈, 일용할 기쁨, 일용할 기도, 일용할 감동, 일용할 봉사’가 소용된다.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브레쩰(Brezel)이란 빵이 있다. 두 팔로 표현한 하트의 가운데 부분이 겹친 모양이다. 배경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어느 수도원에서 자라나는 집 없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성인 수도사들과 어울려 아침기도를 드릴 때 두 팔을 양 어깨에 얹어 기도하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주방에서 일하던 수사가 밀가루 반죽으로 그 장면을 빚어낸 것이 바로 브레쩰이다. 축제 때마다 아이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이 빵은 대표적인 일용할 기쁨이 되었다.
돈 보스꼬는 ‘일상의 영성’을 가리켜 ‘매일의 삶에 충실한 영성, 매일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영성, 매일 만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충실한 영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매일 주어지는 작기에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업무들에 충실한 영성, 아울러 매일 와 닿는 고통스런 상황들을 기꺼이 수용하는 영성’으로 지경을 넓혔다. 무엇보다도 기본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본을 제대로 지키려는 영성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매일의 의무를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해야 할 바를 성실히 해 나갑시다. 일상에 대한 충실, 그것보다 더 큰 봉헌은 없습니다.”(돈보스꼬)
흔히 삶이 곧 기도라는 말도 좋지만, 마치 게으른 사람의 변명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날마다 간구할 일은 많고, 일용할 호흡이 짧은 것을 늘 탓한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일용할 양식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먹는 것 혹은 말씀과 기도와 삶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