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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2]
 
 
 
     
 
 
 
작성일 : 23-08-19 02:06
   
아직도 제사장이 판을 치는 교회들
 글쓴이 : dangdang
조회 : 16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952 [80]


아직도 제사장이 판을 치는 교회들

 

 

선악과는 사과인가, 포도인가

 

 

 

기독교는 살아 있는 생명의 종교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다 죽는다. 동물이 됐건 식물이 됐건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은행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등은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같은 나무들은 1000년도 더 살 수 있다고 한다. 소나무도 5, 600년 이상을 살 수 있다 하니 장수하는 나무 축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브리콜론소나무'는 무려 5000년을 넘게 살았다고 하니 어떤 종의 나무가 가장 수명이 길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떻든 이 나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동물은 식물에 비하면 수명이 짧지만, 인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긴 것들이 많다. 코끼리거북이는 200년 이상을 살고, 대양백조개나 그린랜드상어 같은 것은 400년 이상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사해파리라고도 불리는 홍해파리는 세포가 늙었다가 다시 젊어질 수 있어 이론상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상위 포식자에게 먹힐 수도 있고 질병으로도 죽을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든 이 해파리가 식물 아닌 동물이고 보면 식물이 동물보다 오래 산다는 통념은 사실과 다른 것이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사람도 물론 죽는다. 그러나 사람, 인간의 죽음은 영혼 없는 동식물의 그것과는 다르다. 원시종교에서는 동물은 물론 산천초목뿐 아니라 심지어 바위나 산 같은 무생물에도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데, 그야말로 원시적 사고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어떻든 인간의 죽음은 영혼 없는 동식물의 그것처럼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썩어져 흙이 되는 것으로 끝인 일회성이 아니다. 영원한 죽음, 영멸하는 지옥의 죽음, 엄밀히 말하면 지옥에서 영구히 사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영혼 있는 인간의 죽음은 영혼 없는 동식물의 죽음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한 번 죽는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같다. 다른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예수에 의한 새 생명의 복음을 믿음으로 부활하는 것이 다르다.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부부는, 에덴동산의 각종 열매는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즉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죄를 지음으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죽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동식물의 일회성 죽음과는 다른 영원한 죽음, 영멸의 지옥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영원히 사는 그런 죽음이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어기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으로 그 자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과라는 사람도 있고 포도라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고 어떤 이단에서는 남녀 간의 성(性·sex)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선악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사과래도 좋고 포도래도 상관없다. 그것이 무엇이 됐건 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느냐, 따르지 않고 어겼느냐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면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느냐, 아니면 불순종했느냐에 방점을 찍어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라면 성경 신구약 66권이 이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하라 하고, 하지 말라 한 것이 아담과 하와 부부에 있어서는 선악과에 관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하라는 대로 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일이 되나,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거역하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폐기처분된 제사상제도가 폐기되지 않은 이유

 

 

 

어떻든 인간은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영멸하는 죽음으로 죽게 되었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人子) 즉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 모든 사람, 온 인류가 지은 죄를 모두 맡아 지고 죽어 그 죗값을 치름으로 그들 온 인류를 구원코자 해서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어도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기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고 죽자, 그 순간 성전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손바닥 두께의 튼튼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도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 휘장은 1년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에만 열렸던 것인데, 이렇게 찢어짐으로 영구히 열린 것이다. 따라서 대 제사장은 필요 없게 되었다. 대제사장뿐 아니라 모든 제사장도 할 일을 잃고 말았다.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됨으로 지성소가 없어졌으니 성전(의 기능) 또한 사라졌다.

 

그런데 실제로는 제사장도 엄존하고 성전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많은 목사들은 입으로는 만인제사장설을 설파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들)만이 제사장인양 행동한다. 성경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 그게 아니라 했다가는 비난의 화살을 각오해야 할 것이므로, 입으로는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부정하며 아닌 체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자기는 만인제사장 신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은 아직도 ‘…지어다’로 축도를 마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지어다’가 무엇인가. ‘…해라’를 쓸 자리에 ‘마땅히 그렇게 하여라’라고 표현함으로 장엄한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거들먹거리는 데에 쓰기 딱 좋은 말이다. 축도를 하는 목사가 누구이기에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을 향하여 ‘…해라’보다도 더 강조된 ‘…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목사들은 흔히 축도의 전형으로 고후13:13의 말씀을 가져다 쓰는데, 이 말씀이 ‘있을 지어다’로 맺고 있다. 엄연한 오역이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공동번역은 이를 ‘빕니다’로 바로잡은 것이다. 공동번역뿐 아니라 개신교에서 한 번역 중에도 ‘빕니다’로 옮긴 성경이 있다. 그런데도 아직껏 많은 목사들은 왜 ‘…지어다’를 고집하는 것일까.

 

교회의 바른 성장의 예로 이제는 교회에서 상석이 사라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교회 안에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자의 자리를 따로 두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만 벗어나면 상석은 어김없이 목사의 자리가 된다. 차를 타도 그렇고, 식사자리에서도 그렇다. 8, 90대 노령의 교인 집에 심방을 가도 마찬가지다.

 

그들 목사는, 자기는 목사이니 신앙도 일반 교인들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성경 지식이야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믿음도 좋으라는 법은 없다. 물론 성경을 모르고 좋은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데 성경을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예보다 알고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목사인 나도 어떠어떠한 것은 잘 안 된다는 식의 말을 설교 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례는 이제 너무 흔해 듣는 교인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목사인 나도 그런데 목사 아닌 여러분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는 뜻의 말이다.

 

 

 

 

 

마치는 말

 

 

 

교회건물을 보고 성전이라 하는 것 또한 2천년이나 전인 구 시대적 발상에 의한 것이다. 구약시대의 성막·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장소요, 당신의 영광스런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로 사용하신 공간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이고, 또 성도들 각자의 몸이 성전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보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 안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 각자가 안에 성삼위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의 성전이 주님의 몸과 성도들의 몸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된다. 구약의 성전은 주후 70년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3)고 말씀하신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한다 해서 교회의 권위가 서고 위상이 높아지는가. 아니다. 교인들이 성도가 될 때,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갖춰 가고,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 갈 때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교회가 아니라 추앙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목사 또한 마찬가지다. “…지어다”로 축도를 마친다 해서, 상석에 앉는다 해서, 목사이니 당연히 교인들보다 믿음이 좋은 거라 생각한다 해서 목사로서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지식으로 교인들의 입을 막아 조용한 것을 은혜롭다 할 일도 아니다. 바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좀 시끄럽다고 큰일이 나는가. 아프더라도 곪은 데는 째고 고름을 짜내야 한다.

 

만인제사장설을 입으로 설파한다 해서 성도들 누구나가 다 제사장이 되는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가 말이다. 목사는 교회에서의 한 직분일 뿐이다. 교회라는 몸의 한 지체일 뿐이다. 목사는 권위로 존경받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이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직분이다. 그렇다고 주의 종이니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주의 종은 목사만이 아니라 성도 모두이니 말이다. 목사는 가르치는 자이니 더욱 낮은 종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는 목사의 위상이 떨어져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아니다. 그리하면 교인들은 그러지 말래도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의 위상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다. 역설의 종교 기독교이다. 

 

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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