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다》 (Ida, 2013)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폴란드의 한 수녀원에서 이제 막 서원식을 앞둔 안나는 서원을 하기 전 살아있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만나보라는 원장수녀의 권유를 받고 수녀원을 나선다. 안나는 아기 때 고아원에 넘겨진 후 줄곧 수녀원에서 자랐다. 이모인 완다가 그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그런 이모를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안나는 네가 나처럼 살면 안 되기에 너를 데려오지 않았다는 이모의 대답을 듣는다. 나아가 이모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준다. 너는 유대인이고 진짜 이름 또한 안나가 아니라 ‘이다 레벤스타인’이며 부모 또한 유대인으로서 동네 사람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이때부터 영화는 이다와 이모 완다가 이다 부모의 최후 흔적을 찾아나서는 짧은 여행의 길을 함께하기 시작한다.
제법 방탕하게 인생을 살고 있는 이모는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조카에게 건네며 수도자인 너도 음탕한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 아니라는 조카의 대답에 이모는 유감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해봐. 해보지도 않고 희생을 맹세하면 무슨 의미가 있니?”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가 된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원식을 앞둔 구도자 이다는 이제부터 자신이 버리게 될 것을 깊고 진하게 알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다는 삶과 예술을 사랑했던 엄마에 대해 알게 되고,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는 낭만적인 젊은 예술가 남자도 만난다. 그러나 영화는 전후 폴란드의 어두운 역사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작고 발랄한 밝음에 깊고 진한 어두움을 드리운다. 나치로부터 해방된 2차대전 직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원래 자기 집과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싫어한 일부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다는 이 비참한 역사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부모와 이모의 삶을 목도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수녀원에서 이다는 당장의 서원을 포기하고 만다. 며칠 사이 겪은 감당하기 힘든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제껏 느껴보지 못 한 수많은 감정을 모든 깊이로까지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그 충격 속에서 이다는 스스로 준비가 안 되었다 여기며 서원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의 서원식을 지켜보던 이다는 어떤 계기로 다시 속세로 나가게 되고, 겪어보지 못 한 마지막 감정까지 경험하게 된다.
폴란드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Pawel Pawlikowski)는 자신의 아름다운 영화를 옛 텔레비전의 화면비율이었던 4:3의 화면비율로 흑백영상에 담았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사색적이다. 구도(求道)에 어울리는 장면이, 구도 자체인 장면이 영화에 가득하다. 버려진 부모의 시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하면서 이모 완다는 이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거기 가서 찾으면, 그곳에도 신이 있을까?” 어쩌면 영화 전체는 이다가 자신의 구도 행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만을 버릴 수 있다. 가지지도 못 한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천진한 것이며 때로는 오만하고 유해하기까지 하다. 성스러움을 위한 결단에 앞서 성과 속의 경계를 방황하는 영혼 이다는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 모든 정념을 거치고, 그 모든 정념을 통과하여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다는 수녀원으로 돌아온다. 떠날 때의 순백의 눈 덮인 고요한 아침 길과 달리 돌아가는 저녁 길은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그리고 자신을 지나쳐 세상을 향해 질주하는 차들의 방향과 반대로 슬픔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나 의연하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이다는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그녀의 돌아가는 걸음 위로 알프레드 브렌델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의 곡이 흐른다. “Ich ruf zu dir, Herr Jesu Christ.”, 주 예수여, 내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