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생선회이야기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생선회를 먹은 적이 있었다. 횟집마다 특색이 있다. 스끼다시가 다채로운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이다. 스끼다시(つきだし)는 일본말로 본 음식이 나오기 전에 밑반찬으로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을 뜻한다. 어떤 집들은 스끼다시가 다양한 해산물을 포함한 반찬들로 20가지나 나오는 맛집들도 있다. 반면 어떤 횟집은 메인요리인 회가 많이 나오는 대신 밑반찬은 몇 개 안 나오는 곳도 있다. 개인의 취향대로 횟집을 선택해야 한다. 나도 회를 좋아하지만 스끼다시가 많은 집이 더 좋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 중에서 생선회를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이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이니 회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반면 중국 사람은 회를 거의 먹지 않는다. 한국사람은 일본과 중국 중간쯤 속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생선회를 가장 먼저 먹은 나라 또한 일본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에서 생선회를 가장 늦게 먹은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서 생선회를 사시미(刺身, sashimi)라고 부른다. 사시미라는 단어는 1399년 발행된 '영록가기(鈴鹿家記)'라는 요리책에 처음 나온다. 민물고기인 잉어를 회로 뜨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사시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399년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 즉위하던 해다. 이 무렵 조선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미 다양한 생선회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중기 이전부터 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러니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먼저 생선회를 먹은 것이다. 중국이 현재 회를 거의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과거 중국은 회를 많이 먹었었다. 중국에서 생선회가 갑자기 사라진 때는 원나라가 명나라로 교체된 직후이다. 중국에서 생선회가 사라지고, 조선에서는 한참 유행할 때, 일본에서는 사시미가 아직 요리로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을 때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생선회가 널리 퍼진 시기는 언제일까? 1603년부터 시작되는 에도시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에도 즉 지금의 도쿄에 막부가 설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를 먹기 시작했다.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의 문화 중심지는 일왕이 사는 교토였는데 이곳은 내륙이어서 잉어와 같은 민물생선을 제외하면 신선한 횟감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생선회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이후 바다를 끼고 있어 횟감이 풍부한 도쿄에 막부가 설치되면서 생선회가 일본인의 식탁에서 중요한 기술이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생선회가 일본에서 전국적인 음식으로 발전한 것은 냉장시설과 저장기술이 발달하고 운송수단이 발전한 20세기 이후에 들어서고 나서다.
중국의 생선요리는 찜, 튀김, 조림 등 다양하다. 하지만 생선회는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의 고문헌을 보면 중국인들도 회를 즐겨 먹었던 것으로 나온다. 고대 중국의 상류사회에서 생선회는 일반적인 음식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생선회가 가장 유행했던 시기는 당송 무렵이다. 그런데 명나라 때 모든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지 말자고 결의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회가 사라졌다. 우리나라 기록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 때 사람인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병사들이 조선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보고 물고기를 날로 먹는 것은 오랑캐의 습관이라며 비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중국인은 회를 먹지 않는다며 조선사람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긴다는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명나라 말기이니 이 무렵의 중국인들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오랑케의 습관이라며 비웃었다면 중국에서 회를 먹는 습관은 이미 사라졌다고 보여진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몰고 온 명나라 병사들은 주로 북방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바다가 없는 곳 출신이어서 생선회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문헌에서 명청 이후에는 생선회에 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생선회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로 여러 가지 원인을 꼽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전염병의 유행 때문이다. 전염병 유행의 원인으로 생선이 지목되면서 생선회를 먹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14세기와 15세기, 16-17세기 중국은 곳곳에서 전염병에 시달렸고 원나라 혜종 때는 재위기간 중 무려 12차례나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3대 황제 연락제 때도 북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을 정도로 역병이 크게 돌았다. 17세기에 돈 전염병은 명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될 정도였다. 전염병이 돌면서 날생선 먹기를 꺼리게 됐고 그 결과 송나라 때도 크게 유행했던 생선회 문화가 원을 거치고 명나라 무렵에는 완전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임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