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나를 믿으신다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교회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매우 인간적이기에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제 프랜시스 치점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이 유명한 소설은 원작과는 사뭇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꽤 재미있었던 흑백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소설에 묘사된 보잘것없는 치점 신부의 외모와 영화에 나온 배우의 외모일 것이다. 젊은 그레고리 펙이라니, 그렇게 잘생긴 목사나 신부가 과연 현실세계에 있을까?
소설의 여러 부분이 그랬지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렸던 장면은 중국 선교의 과정에서 치점 신부가 그의 절친이자 철저한 무신론자인 의사 윌리 탈록과 함께 페스트와 치열히 싸우던 중 그만 탈록이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 장면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탈록과 치점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이상하지, 아직도 신이 믿어지지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을 텐데.” “이 사람아 무리하지 말게.. 나는 회개하지 않아.” “인간의 괴로움, 그게 다 회개하는 행위라네.” 천국으로 보내려고 들볶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마치고 탈록은 숨을 거둔다.
신뢰와 믿음. 사람 사이에서 이것은 언제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일방적인 믿음과 신뢰는 의미가 없다.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는다. 이렇게 믿음으로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 사이의 간단한 법칙을 신과 인간 사이에는 적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이것이 문제다. 사도신경의 시작이자 그 명칭이 된 ‘Credo’는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이 아니던가. 우리는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이해하고 신을 주(Lord)로 부르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경배를 받으시고, 기도를 받으시며, 믿음을 받으시는 ‘주인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전부일까? 언젠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내 친구다.” 그리고 친구 사이에 중요한 것은 신뢰, 서로를 향한 신뢰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에 대해 신학자 도로테 죌레보다 더 아름답게 설명한 사람이 있을까? 치점 신부처럼 역시 평생을 신학계의 비주류로 살았던 독일의 이 여성 신학자는 남성 신학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간 창조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주종관계 속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하나님은 예배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말할 때, 도로테 죌레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외로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셨다.” 이 말로 신학자는 사실 여부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신다.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믿으신다. 그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나를 신뢰하는 친구를 향한 신뢰,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내 친구다.” (요 15:14)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