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가 그린 예수님
신학교 독일어 수업교재였던 독일어 신약성경(<Die Gute Nachricht>)에는 군데군데 흑백 삽화가 담겨있었다. 낯선 알파벳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그림은 점점 친숙해졌다. 단순한 스케치에 먹이 번지듯 표현한 성경 삽화는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다. 쉽게 그린 듯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기숙사 오픈하우스 때 삽화를 베낀 그림들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모방은 쉬웠지만, 창작은 얼마나 무모한 일일까?
평소 십자가를 수집하면서 단순한 십자가 안에 녹여 든 생동감 넘치는 표현에 감탄한다. 그들의 조형예술은 천재적 영감이라기보다, 오랜 훈련으로 익숙해진 경건미였다. 독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는 메달용 십자가 소품들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아이들은 입교식 기념으로 십자가 메달을 선물 받는다. 성경 이야기가 그림 언어와 함께 십자가로 재구성된 것이다. 1994년 12월, 내가 맨 처음 구한 십자가는 엠마오 이야기를 새긴 메달형이다.
독일의 성물 작가로는 에기노 바이너트(1920-2012)가 대표적이다. 바이너트는 금속공예 작가이자 화가로, 교황청이 2001년 대희년을 맞아 그의 칠보(漆保)공예 성화 작품으로 기념 우표를 만들 정도이다. 작품 세계로는 바티칸은 물론 유럽의 현대식 성당들의 대형 십자가나 제단화 혹은 성배들로 유명세를 탔지만, 정작 그를 친숙하게 만든 것은 작은 메달형 성화 작품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탈주한 그는 게슈타포가 그의 집 현관에 설치한 부비트랩이 터져 재능있는 오른손을 잃은 후, 평생 왼손으로 거룩한 작업에 몰두하였다.
바이너트가 영향을 받은 사람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테나 막스 페히슈타인이라고 한다. 실은 누구보다 모든 성화 작가들이 인정하듯, 그의 영감 역시 복음서를 그린 누가에서 왔을 것이 틀림없다. 세 번째 복음서 기록자 누가는 ‘화가들의 수호성인’이라고 불린다. 의사 출신(골 4:14)으로 역사가, 여행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화가라고 인정하는 일은 낯설다.
놀랍게도 누가를 화가로 공인한 사람들은 현역 화가 자신들이다. 정교회의 ‘성 누가’ 이콘은 누가를 화가로 그렸다. 이콘 속 주인공 누가는 또 하나의 이콘 ‘성 모자’를 그리는 중이다. 스페인 톨레도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의 ‘화가 성 누가’가 걸려있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는 장면인데, 그는 문자와 함께 나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화가 도메니코 크레스티, 마아텐 반 헴스케르크, 데릭 배거트, 바사리 조르지오, 구에르치노 등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작품에서 화가 누가가 복음을 그리는 장면들을 연출하였다.
‘누가가 그린 예수님’은 이러한 화가들의 고백에서 힌트를 얻은 성경공부이다. 2020년 주제성경으로 정하고 수요기도회에서 40회 동안 이어가기로 했는데, 출발도 하기 전에 코로나19로 무기한 휴강 상태가 계속되었다. 누가복음을 40등분 하여 ‘복음을 기록한 누가’(눅 1:1-4)부터 ‘승천하신 예수님’(눅 24:44-53)까지 온 세상의 그림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일은 애초에 무모한 시도였다. 게다가 이제부터 파워포인트를 배워야 할 참이었다. 다행히 3년 반 만에 600여 점을 소개하면서 끝낼 수 있었는데, 코로나19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많은 화가들은 누가복음을 통해 거룩한 주제의 작품들을 그렸다. 누가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 보다 더 동적이고, 흥미진진하게 스토리 텔링을 한 덕분이다. 성서화(Biblical Art)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나 사건과 교훈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성경 그 자체의 내용을 주제로 하는 미술이다. 중세기 성경 필사본에 담긴 삽화들이나, 아일랜드와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에서 본 옛 성경들의 아름다운 채색장정들은 무명의 작가들과 함께 거룩한 메시지로 빛난다.
오늘에 이르는 수많은 필사가와 삽화가들은 모두 복음화가 누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덕분에 지난 2천 년 동안 성경은 더욱 풍성해졌고, 렘브란트(1606-1669)는 물론 제임스 티소(1836-1902)와 에밀 놀테(1857-1956)의 성서화들과 함께 키스 드 코르트(1934-2022)와 안네게르트 푹스후버(1940-1998)가 그린 어린이용 그림책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누가가 그린 예수님’을 공부하면서 가장 오래 여운이 남은 작품은 제임스 티소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신 것’이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찬사를 받던 상류층 화가인데, 뒤늦게 종교화로 작품 세계를 바꿨다. 대부분 십자가 처형을 그린 작품들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다. 십자고상(Crucifixion)을 중심에 두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는데 비해, 티소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과 그 주변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렇게 복음서의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일, 그 역시 성경화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