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추 형제의 고백
몇 달 전의 일이다. 만만찮은 번역원고에 골머리 앓다가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기도원에 올라갔다. 가끔 기도원에 올라가면 방을 하나 얻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내려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여러 명이 함께 묵는 방을 얻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대성전’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각자 ‘기도굴’에 들어가서 기도하기 때문에 혼자서 방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머리를 좀 식히고, 까탈스런 문장들을 다시 손보기로 작정했다. 낮에 조용할 때 집중해서 글을 쓰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저녁에는 침대에 누워서 원고를 조금씩 읽을 생각이었다.
낮에 미처 작업을 끝내지 못해서 저녁까지 바닥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나이가 지긋한 분이 예배를 마치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조심스레 묻는다.
“선생님. 저는 아무리 읽어도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도무지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일흔이 훌쩍 넘으신 노인인데, 뒤늦게 신앙을 가지게 됐다면서 이것저것 묻는다. 당장 내 일이 바빴기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럽고 한편으론 번거롭기도 했지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딸과 함께 캐나다에서 살면서 한인교회에 다니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는데,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성경공부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지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신앙이 좀처럼 자라지 않는다면서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하루에 네 번 있는 기도원의 예배에 빠지고 그 시간 동안에 성경을 배우고 싶다면서 사정을 하는데.., 정작 나는 다음날 기도원에서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내가 노인에게 말하는 동안, 왠지 모르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듣고있던 한 남자가 내게 불쑥 다가왔다. “선생님, 그러면 이건 무슨 뜻입니까?”.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남자는 심한 곱사등이었다.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매우 왜소해 보였던 남자는 언뜻 보기에 인상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인상만이 아니라 질문하는 태도도 영 불손했고, 눈빛도 곱지 않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건지, 사람을 떠보려는 건지 모를 정도로 투박하게 말하던 남자가 느닷없이 목소리의 톤을 낮추며, “고맙습니다, 선생님!”하며 공손하게 한 마디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기 침대로 돌아가더니 뜬금없이 “아, 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툭 던지고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기도원을 떠나기 전에 산책 삼아 동산에 올라갔다가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 예배시간인데 왜 안 들어갔습니까?”. 그에게 물었더니 대뜸 한다는 대답이, “저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다”였다.
무슨 뜻인지 따져 묻기도 전에 남자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곱사등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대하기가 싫어서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목공을 배웠다고 말했다. “목공들 가운데 가장 기술이 뛰어난 목공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십니까?”
알 길이 없는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자는 내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불상 만드는 일입니다. 저는 불상 만드는 회사에 다녔는데, 직원이 120명 가량 되는, 제법 큰 회사였습니다. 그때 대졸자 초임이 30만원 정도였고 부장이 80만원 받았지만, 저는 120만원에 별도로 특별수당까지 받았습니다”.
내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내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돈을 벌면 매일 술집에 가서 탕진했습니다. 저를 사람처럼 대해주는 곳은 술집 아가씨들 뿐이었으니까요. 물론 돈 때문이지만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돈을 벌 수 있었고,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술집에 가서 흥청망청 돈을 써가며 즐길 수도 있었지만 마음 한 켠에 항상 무거운 짐이 있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잠깐 교회에 다니면서 들었던 말씀이 떠오르면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불상 만드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침내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전기)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입은 이전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지만 떳떳하게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줄어든 수입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교회에 나가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앉아있으면, 맨날 하나님 믿으면 복 받고, 돈 벌고, 건강해진다는 말뿐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돈 벌고 싶으면 저는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마음에 담고있던 생각들을 모두 털어놓기로 작정한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끊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동네 교회에서 들었던 말씀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구원에 관한 말씀같았습니다. 불구자로 태어난 저는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기를 소망했기 때문에 세상의 고난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정작 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 않고 맨날 세상의 복만 강조할 뿐이었습니다”
쉴새없이 말을 토해내던 그의 목소리에 어느새 탄식이 묻어났다.
“교회를 옮겨 보았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참 설교를 듣다보면 결국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틀에 박힌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쉬는 날이면 이렇게 기도원에 올라와서 혼자서 기도하다가 내려갑니다”.
그 남자는 새로 옮긴 직장에서도 기술을 인정받아서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급여도 꽤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남보다 일을 잘하면 덩달아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휴가를 금요일 달랑 하루 밖에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말까지 포함해서 3일을 쉬는데 그 기간을 혼자서 기도원에서 보낼 생각으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들어보면, 특별히 성경을 배운 것도 없었고 교회에도 거의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 형제는 결코 만만한 신앙이 아니었다.
전날밤에 내게 불손하게(?) 대했던 이유가 있었다.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때문이었다. 이제는 교회에 나갈 마음이 없다면서, 대신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토로했다.
어렸을 때 잠깐 들었을 뿐이지만, 지금같은 한국교회의 신앙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거침없이 일갈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왠지 그의 말이 ‘어떤 한 사람’의 스쳐 지나가는 음성으로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겠다면서 꼭 연락해달라는 그의 기운찬 음성이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울린다.
그의 말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주의 음성이 새삼 영혼을 울린다. 천국은 세상의 부요에 취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난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소유라는 주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차고 넘치는 복을 많이 받아서 너무 행복한(?) 사람들.., 너무 뻐길 일이 아니다!
강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