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메오 나귀
성경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에서 나귀는 까메오(Cameo)처럼 깜짝 등장한다. 비록 단역일망정 모든 나귀들은 하나같이 친밀감을 준다. 제물로 바칠 아들을 태운 아브라함의 나귀(창 22:3), 애굽으로 되돌아가던 모세의 가족을 태운 나귀(출 4:20), 주인의 잘못을 책망한 발람의 나귀(민 22:30), 평화로운 임무를 수행한 오뎃의 나귀(대하 28:15)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귀(눅 10:34)가 대표적이다.
나귀는 본디 체질이 강건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이 크며, 먹음새가 좋은 짐승이다. 무엇보다 인내심이 강해 예부터 온갖 험한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늘 말과 비교를 당하면서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나귀는 말과 비교해 덩치가 작고, 앞머리에 아름다운 긴 털도 없다. 종종 사람들은 나귀를 가리켜 모욕적인 종자타령을 하였다. 이솝이나, 셰익스피어는 물론 심지어 피노키오 이야기까지 나귀의 어리석음을 놀려댔다. 나귀는 동서를 막론하고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짐승을 손꼽으라면 단연 나귀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을 등에 태운 ‘어린 나귀’(요 12:14)이다. 나귀 등에 타신 예수님은 모든 왕 중의 왕이며, 모든 종 가운데 종으로 오신 메시야였다. 비록 볼품은 없지만 어린 나귀는 평소 겸손하고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연상케 한다. 가장 초라한 시골뜨기 짐승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호산나 찬양을 받으셨다.
만약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황금수레를 타고 붉은 옷을 입었다면 더 근사했을지 모른다. 말발굽 소리 요란하고, 열병 의식 장엄한 로마군대의 개선 행진을 연상한 사람들에게 나귀 새끼를 탄 메시야의 모습은 차라리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높이 앉아 내려다보는 말과 달리 나귀에게는 위엄이 없다. 게다가 나귀 다리가 짧으니 등 위에 앉아도 서 있는 무리와 얼굴과 얼굴을 맞댈 정도였을 것이다. 메시야의 행렬에서 뒤뚱거리는 나귀의 초라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복음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상식이나 관행과 다르다. 나귀는 메시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귀는 말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말은 전쟁을,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기러 가는 모습이 아니라, 지러 가는 모습이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교회의 착한 봉사자들은 나귀라고 불렸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다. 세계적인 봉사단체들은 나귀를 자신의 상징 동물로 삼고 있다. 복음을 위한 일꾼들은 대체로 나귀의 임무를 맡은 셈이다. 비록 짐이 크고, 멍에가 무겁지만 기쁨과 은총을 약속받았다. 그들은 나귀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배웠을 것이다. 서양에서 아기들에게 선물하는 동물 인형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곰 인형(테드 베어)지만, 그것은 근래의 일이고 전통적으로 나귀 인형을 따르지 못한다.
레너드 스위트는 서부 개척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나귀 이야기를 전한다. 금을 캐는 광부는 자신의 동반자로서 말보다 당나귀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구부러진 벼랑길, 미끄러운 강가의 돌길을 가로지르는 데는 덩치 큰 말보다 낮은 높이의 나귀가 훨씬 안전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짐인 금가루와 금괴를 나를 수 있는 짐승은 오직 나귀뿐이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80번째 생일잔치 때 이렇게 말했다. “나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싣고 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당신의 중요한 짐을 싣도록 부름을 받은 나귀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더 테레사의 코치는 참 적절하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실함을 위해 부름 받았다.”
키가 낮으나 무릎이 억센 보잘 것없는 짐승에게 부여된 역할은 한결같이 충성스러운 모습이어서, 나귀는 명예로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무엇보다 나귀에게는 건장한 어깨 사이 가슴 부분에 독특한 검은 무늬가 있다. 사람들은 이 무늬를 예수님을 겸손하게 섬겼던 나귀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겼다. 나귀에게 부여된 명예로운 십자가 표식인 것이다.
송병구/색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