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특새도 식후경
사순절이 되어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12년 넘게 목회를 해왔던 교회, 섬기기도 했지만 때로 군림하는 자세(?)가 되었던 사역의 현장입니다. 달리 교만이 아닙니다. 이정도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스스로 위로하며 지나온 낙관과 무지의 시간을 지나 이제 홀로 서있는 곳에서 피할 수 없는 그 분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못 비장한 마음도 들어 몇 사람이 나와서 함께 기도하는 새벽시간에 사순절 새벽기도를 선포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읽어오던 마태복음 순서와 결대로 읽으니, 재의 수요일에는 수난예고를, 올 해 부활절 4월 9일 새벽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내내 십자가를 앞둔 행적을 읽고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365 매일 새벽기도인데, 또 특별할 것은 무엇인가 싶으면서도 나름의 의미는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특별한 기간과 의미를 분절시켜 되새기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입니다.
사순절이면 또한 '금식'입니다. 사진과 말들이 무성한 소셜 미디어에서 사순절임을 먼저 광고해줍니다. 금식을 선포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단골은 미디어 금식, 고독과 구별됨, 사교적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는 식의 절제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자기 욕망이 발산될 길목을 차단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 뜻은 분명히 알겠지만 이를 드러내는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무엇인가 '하지 않는 것'이 어느새 사순절의 목표가 돼버린 분위기입니다.
'언제까지 몇 끼'라는 식의 횟수 제한과 근절 그 자체로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형식이라는 그릇을 갖추어야 정신의 물이 고이겠지만, 사순절이 빈 그릇을 준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절기는 아닙니다. 이 때에 무언가를 비우고, 하지 않음으로 사순절답게 보냈다고 안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따름’이 없는 믿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려놓음'과 '기다림'이라는 거룩한 주제 뒤에 십자가는 지지 않겠다는 '신앙 편의주의'가 숨어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 생애 속에서 고난과 희생을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보내는 절기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구현되는 정점이며 십자가의 길, 골고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걸어가는 구체적 실천이 요구되는 시절입니다.
절제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금식은 배고픔 속에서 비워진 예민한 영적 감수성으로 기도하기 위한 방편이며, 손에서 놓지 않고 늘 붙들고 살던 전화기와 눈을 떼지 못했던 컴퓨터를 멈추는 시간은 그것을 하지 않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 읽기를 위한 시간 확보의 수단이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자칫 병든 사람과 같은 모습과 어두운 낯빛으로 사순절을 시들하게 만들 요량이라면 차라리 든든히 먹고 기도하며 경건의 생활을 열심히 감당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로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 없이 살게 되면 저희 자신도 잃는 것임을.
(중략)
저희 각자에게 참된 자각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소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그 뜻을 행하는 것이,
먹는 것처럼 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임을 알게 하소서.
먹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그렇게 되면 살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그렇게 되면 스스로를 해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빛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저희로 분명히 알게 하소서.
아버지의 빛 안에 살 때
참으로 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 기도합니다.
Peter Marshall(1902-1949)의 기도문
신현희/안산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