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이독립’(出以獨立)
한국교회는 3.1절과 8.15 광복절을 민족의 절기로 기억하고 기념한다. 현재 교회력 외에 기념 주일로 지키는 민족절기는 삼일절과 광복절이 유이(有二)하다.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 이후에도 오래도록 독립과 해방이란 공통의 의식을 공유해 왔던 한국교회였다. 물론 독립과 해방에 대한 미완(未完)의 감정이 입장차이를 불러올 수 있으나, 그것은 강약의 정도였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일본 식민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은 커다란 병통(病痛)이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그들은 전쟁과 독재 권력이 주는 이익에 기생해 왔다. 만약 3.1독립정신과 완전한 해방 의지가 주춤하거나 왜곡된다면 대를 이어 특권과 안락을 누리려던 그들이 다시 안방을 차지하여,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놓으려고 할 것이다.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갈 위험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삼일절과 광복절을 민족절기로서 바르게 세우는 일은 겨레의 고난과 함께 해온 한국인의 교회로서 바른 소명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3.1운동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었다. 당시 조선 사람에게 그리스도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남의 나라 종교로 여겨졌다. 눈이 파란 선교사들의 종교일 뿐이었다. 규모도 지극히 소수였기에 존재감도 부족하였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명 중 절반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전국에서 마을마다 교회가 앞장서 태극기를 들었고,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종교가 아닌 바로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되었다. 비로소 민족의 신앙으로서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1919년 3월 이전, 이 나라는 공동묘지와 다름없었다. 일제에 대한 원망과 고통을 속으로만 삼켰다. 점점 비겁한 침묵만이 지배하였다. 비로소 만세운동 후에 희망의 아우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민족의 대각성 운동이다. 당시 2천만 인구 중 210만 명이 자진하여 항일반봉건 시위에 참가하였다. 차차 사위어 가던 이 민족은 범국민적 항쟁을 통해 독립이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되었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독립국이고 나는 자주민이다.” 양반이든 평민이든 더 이상 조선 왕의 백성이 아닌 자유로운 주권을 지닌 시민의식이 깨어났다. ‘나는 왕의 백성이 아닌, 내 운명의 주인이다’란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한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3.1정신이라고 부른다. 3.1운동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볼 때 인식변화의 내용은 가히 혁명적이다.
민족 대표 33인 중 맨 마지막에 참여한 이는 신석구 목사(수표교감리교회)였다. 종교교회 오화영 목사에게 민족 대표로 참여할 것을 요청받은 그는 즉답을 피하였다. 자서전에서 밝힌 이유다.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치 않고 좀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석구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민족의 독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앙과 민족, 두 가지는 양자택일이 아닌 모두 품어야 할 절대가치였다. 그러던 중 신석구 목사는 2월 27일 새벽기도 중에 뜻을 정하였다. 민족 대표로 나서지 않고 회피한다면 그것이 더욱 큰 죄라는 깨달음을 주신 것이다. 신석구 목사는 자신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석구가 뿌린 씨앗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국권을 빼앗긴 망실의 아픔을 주권을 되찾으려는 피의 외침으로 바꾼 것이 3.1운동의 출발이라면 삼일정신은 이전의 100년과 이후의 100년을 두루 품고 있다. 그 내용은 정의, 공평, 인간존엄, 생명과 평화이며, 자주독립국가와 완전한 해방의 실현이다. 지금 각성해야 할 주역은 역사인식은 커녕,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 주저 앉아 있는 오늘의 교회, 우리 자신이다.
송병구/색동교회